일생동안 세 차례 감옥생활, 다섯 차례 유배, 총 유배기간 30년
스님의 말씀을 교훈적으로 자신의 인생에 이입시킨 「산지사기」
| |  | |
| |
| | 북헌 김춘택 영정 | |
| |
# 권력 투쟁인 당쟁
"갑(甲)이 옳다고 내세우는 것을 을(乙)이 죄주고, 을이 의롭다고 말하는 것을 갑이 또 악하다고 뒤떠드니, 이러고서야 명의(名義)가 떳떳함이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옛날부터 붕당(朋黨)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저마다 군자(君子)라고 자칭하고, 남은 소인(小人)이라고 배척했기 때문에 뒤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병으로 삼았었다. 지금은 이보다 더 심해서 소인이라고 지목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에 만족하지 못함인지 반드시 명의(名義)의 설(說)을 빌어가지고 난적(亂賊)의 함정에까지 몰아넣은 뒤에야 쾌하게 여기니 이야말로 어질지 못하기 짝이 없으며, 작용자(作俑者,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로 장사지낼 때 매장하는 것)보다도 더한 허물이 있는 것이다"라고 이건창(李建昌)은 극심했던 조선시대 당쟁의 폐단을 말한다.
당쟁은 연산군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약 360년 동안 쉴 새 없이 일어난 정권 장악을 위한 당파싸움이다. 당파는 왕권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당색(黨色)간 격렬한 투쟁의 양상을 보이면서, 끊임없는 무고(誣告)와 공작 정치를 탄생시켰고, 이 와중에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장살(杖殺)되거나 유배, 사약을 받고 죽는 선비들이 속출하였다. 그마나 유배되었다가 복권된 선비들은 행운이었다고 하나 유배지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선비들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제주에 온 유배인들 가운데 비극적인 인물은 충암 김정과 우암 송시열이다. 김정은 제주에서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사약을 받았으며, 송시열은 남인들의 요구에 왕명을 받고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제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또 평생을 옥사와 유배로 보낸 이도 있었으니, 바로 제주 유배인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이다. 김춘택의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그는 1670년 윤 2월 4일에 태어나 18세 되던 해, 숙종의 장인이었던 할아버지 김만기(金萬基)가 돌아가시자, 작은 할아버지(從祖父)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에게 배웠다. 김만기는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다. 또 작은 할아버지 김만중은 《사씨남정기》를 지은 문인이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작은 할아버지 김만중과 아버지 김진구(金鎭龜)가 유배되고, 할아버지 김만기(金萬基)의 공신훈(功臣勳)이 삭적(削籍)되는 등 숙종의 외척(外戚)이자 노론(老論)의 명문 집안이었던 북헌의 집안은 큰 피해를 입었다.
| |  | |
| |
| | 고종이 내린 이조판서 추증 교지 | |
| |
# 제주와 인연이 깊은 북헌
김춘택의 인생은 무고(誣告)에 의해서 달라졌다. 1705년 임부(林溥)는 왕이 눈병에 걸리면서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말을 꺼내자, 당황한 대신들은 집단시위를 벌여 왕위 계승 문제를 중지시키면서 민심이 혼란해졌다. 마침 임부가 이듬 해 6월에 상소를 올렸는데, '1701년(숙종21) 인현왕후의 모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의 벗 윤순명의 공술에 "장희재가 대정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속에 김춘택이 장희재의 처와 간통을 하여 자신(희재)을 없앤 후 희빈 소생의 세자에게 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문제는 <세자모해(謀害)>의 정치적 사건으로 번져나갔다. 이에 숙종은 분노하여 임부를 긴급체포하여 국문을 열었고, 1701년에 부안에 유배되었던 김춘택을 불렀다. 김춘택은 임부의 상소는 무고이며, 즉 "윤순명이 나를 죄에 연루시키기 위한 조작"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같은 해 9월 제주에 이배(移配) 되었다.
김춘택이 유배 오기 전 제주에 온 것은 1689년, 제주에 유배 온 아버지 김진구를 공양하기 위해서 6년 동안 체류하였다. 1706년에 무고로 <세자모해>사건에 다시 연루돼 9월말 조천포에 도착하여 제주성 동문의 적거지로 왔다. 김춘택은 십 수 년 전 아버지가 유배시 거처하던 방에 먼저 위패를 모셨다. 아버지 김진구가 죄인으로 적거하였고, 자신이 16년 후에 다시 죄인이 되어 적거하게 된 집의 위치를 <제주 동천 적거기(濟州東泉謫居記)>에 기록해 두었다. "오직 제주 사람들만 머뭇거리며 유감으로 탄식하는 것은 언젠가는 잊혀질까 염려된다. 황량한 옛터를 가리키며 여기서 김씨 두 세대가 유배와 살던 곳이라고 하게 될 것이다…그 다음 세대에 관계있던 곳을 찾아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집을 역시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집은 동문 안 1리쯤에 있고, 가락쿳물이 그 앞을 지나고 있으므로 동천(東泉)이라고 한다. 창을 열면 한라산이 보이고, 서쪽 마당에는 밀감나무가 있고, 북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하고 집주인은 주기(州妓)인 오진(吳眞)이다." 그 후 산지(山池)에 있는 이윤의 집에 머물다가, 남문 청풍대(淸風臺) 근방으로 옮겨 유배를 살았다.
김춘택이 유배 온 시기에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오정빈(吳廷賓), 고만첨(高萬瞻)이 제주순무어사(濟州巡撫御使) 이해조(李海朝)의 시취(試取)에 급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유배 중에 그는 후학들을 위해 교육에 힘썼으니 산지의 집주인 이윤의 아들 이중발(李重發)을 문사로 받아들였다. 제주에 유배 온지 몇 년 뒤, 8월에 김선필의 노비 박의량(朴義良)이 "내관 김선필과 김춘택이 범상죄(犯上罪)를 도모하였다"고 무고하여 같은 해 9월에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무죄로 밝혀져 적거지로 돌아왔다가 다시 전라도 임피(臨陂)로 유배, 1714년 다시 제주에 유배왔다가 1년 뒤에 풀려났다. 그의 시에 <대정을 지나며>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때의 적소가 대정이었고 그곳이 최후의 유배지였던 것 같다.
| |  | |
| |
| | 김춘택의 적거지 앞 가락쿳물이 있던 자리 | |
| |
# 오랜 유배, 많은 문학작품 남겨
김춘택은 일생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유배형을 받았다. 총 유배기간은 30년. 유배지 다섯 곳은 황해도 금천(金川)을 시작으로 부안(扶安), 해남, 제주목, 대정현이다. 제주에서의 유배 기간 동안 제주의 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시문을 많이 남겨 오늘날 당시를 조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지 적거지 주인이었던 이윤이 죽자 아들 이중발의 부탁으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아버지 문하생 사앙(士昻) 고만첨(高萬瞻:萬秋)을 제주에 보내며 아쉬운 마음을 담은 <고만추를 보내며(送高萬秋)>, 제사음식을 준 고마운 적거지 주인 이윤을 위해 쓴 시, 산지의 이런저런 풍광을 읊은 <산지칠가(山池七歌)>, 제주말을 싣고 떠나는 정경을 노래한 <재마선(載馬船)>, 이윤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輓詞), 유배인의 외롭고 고달픈 심사를 담은 <적사(謫舍)>, <청풍대(淸風臺)>, 제주의 풍속을 노래한 <제주를 읊다(詠濟州)>, 제주와 죄인의 심정을 인상적으로 그린 <수해록(囚海錄)>시(詩)와 문(文), 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섭해록(涉海錄)>, 임보의 무고로 체포된 과정을 그린<후피체록(後被逮錄)>, 잠녀들의 고달픈 일상을 그린 <잠녀설(潛女說)>, 스님의 말씀을 교훈적으로 자신의 인생에 이입시킨<산지사기(山池舍記)>등이 있다. 그는 제주 유배동안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을 창작하였고,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장진주사(將進酒辭)>와 <속미인곡>,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 서포 김만중의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한역하였다.
김춘택은 생전에 시간이 나는대로 자신의 시문을 스스로 편집해 놓을 정도로 문집을 남기려고 열의를 보였다. 1712년 임피에서 돌아온 뒤 자신의 문집을 정리해 두었고, 유배가 풀리고 작고 한 해 전인 1716년까지 자신의 글들을 모아두었다. 그의 저서는 목활자본으로 20권 7책의 《북헌집》이 있고, 따로 <만필(漫筆)> 1책이 있다. 《북헌집》은 그의 손자 두추(斗秋)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1886년(고종 23) 12월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은 김춘택을 새롭게 조명하며 그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임금께 아뢰었다.
"고(故) 사인(士人) 김춘택은 조상을 바르게 본받은 훌륭한 후손으로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으니…그의 연원(淵源)과 문로(門路)가 바름을 알 수 있습니다…그의 문장은 풍부하고 의론은 바르고 곧아 벼슬 없는 선비로서 재상의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간사한 무리들이 함정으로 끌어들여 세 차례 감옥에 갇혔으며 다섯 차례 먼 지방으로 유배를 당하였습니다…탁월한 충성과 정의로 윤리와 기강을 부식(扶植)시킨 일은 백세토록 영원히 칭찬의 말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학문과 지조를 지닌 그는 실로 조정의 흠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에 김춘택은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고, 2년 뒤 11월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조정으로부터 받았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