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2. 농부화가 밀레

농부 화가 작품서 평안한 안식과 참다운 영혼의 위안 느낄 수 있어
밀레의 「돼지잡기」, 「밀 타작」 제주 돗추렴, 도리깨질 문화와 유사

   
 
  ▲ 밀레, <돼지잡기>, 목탄+파스텔, 68.1x88.4㎝, 1867~1870년 사이, 보스턴미술관.  
 
# 우리에게 익숙한 「만종」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작품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도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만종>일 것이다.

1865년 밀레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만종>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만종>은 내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린 그림이라네. 옛날에 우리가 밭에서 일할 때 저녁 종소리가 들리면, 어쩌면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 일손을 멈추게 하고는 삼종기도를 올리게 하셨는지 모르겠어. 그럼 우리는 모자를 손에 쥐고서 아주 경건하게 고인이 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지."

<만종>은 바로 밀레 집안의 기억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다. 그의 가족들은 바
   
 
  ▲ 돗통시의 돼지.  
 
르비종 들판에서 일하다 저녁 종소리가 울리면 이 땅에 살다가 고인이 된 농부들의 명복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이런 내용을 부부로 표현한 것이다.

밀레는 1814년 10월 4일 프랑스 서쪽 노르망디 지방에 속한 그뤼시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밀레의 정규교육은 초등학교로 끝나지만 12살 무렵 동네 신부님으로부터 라틴어를 배우며 고전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장남인 밀레는 농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1835년 고향에서 가까운 도시 셰르부르 시에서 미술 수업을 시작하면서 밀레는 성경이나 철학, 서사시, 농경시들을 폭넓게 알게 되었다.

   
 
  ▲ 밀레, <여름, 밀 타작하는 사람들>, 유화, 1868~1874년 사이, 보스턴미술관.  
 
# 파리로 떠난 농부, 거장이 되다


밀레의 재능을 인정한 셰르부르 시의회에서는 그에게 장학금을 주어 파리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1937년 3월에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폴 들라로슈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러나 기대를 가졌던 로마상에 낙선하자 밀레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후 밀레는 박물관을 수없이 드나들면서 미술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밀레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들에게 평가받기 위해서 파리 살롱전에 도전하였다. 1840년 수차례 낙선한 끝에 초상화 한 점이 살롱전에 입선되면서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세르부르 시에 돌아와서는 지방 유지들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부인이 죽자 1844년, 고향 노르망디의
   
 
  ▲ 도리깨질, 만농 홍정표 사진.  
 
그뤼시로 돌아와서 고향에서 예전처럼 초상화를 그렸다. 이때부터 밀레는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한 친구의 소개로 밀레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 알프레드 상시에를 만났다. 밀레는 1849년부터 1874년까지 25년 동안 상시에게 600통의 편지를 쓸 정도로 절친하였다. 후에 상시에는 이 편지를 기초로 하여 <장 프랑수아 밀레의 삶과 작품>이란 평전(評傳)을 썼으나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루이 필립의 제정(帝政) 말기는 극심한 경제난이 프랑스와 유럽전역을 휩쓸었다. 이에 대한 위기의식이, 정치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1848년 2월 혁명이었다. 2월 혁명 이후 역사화가 주종을 이루던 프랑스 화단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밀레는 자신의 고향 농촌 마을을 그려야겠다는 다짐을 하였고, 급기야 1849년 봄, 콜레라가 창궐하던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에 정착하였다.

밀레는 바르비종에 사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하였다. 1850~1851년 살롱전에 출품키 위해 구상한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에게 명성을 안겨주었다. 밀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삭줍기>는 1857년 살롱전에 출품되자 독창적인 화면 구성 때문에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지만, 사실은 추수가 끝난 밭에서 겨울을 날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이삭을 줍는 농촌 여인들의 고되고 슬픈 삶을 따뜻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1870년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발발 직후인 8월에 밀레는 바르비종을 피해 셰르부르 부근에 정착하였다. 1871년까지 11월, 그는 바르비종으로 돌아왔다. 이듬해부터 그림 주문도 밀리기 시작하여 밀레의 그림 값도 오르기 시작하였다. 1874년 밀레는 정부로부터 프랑스의 위인들 묘지와 기념비가 있는 팡테옹 사원의 벽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1875년 1월 20일 향년 60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바르비종 시 공동묘지에 먼저 잠든 테오도르 루소의 곁에 묻혔다. 또 그로부터 2년 뒤 평생의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상시에도 밀레의 전기를 마치지 못하고 그 곁에 묻혔다.

# 밀레의 작품으로 보는 제주문화

밀레의 그림들은 농촌의 소박한 일상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프랑스 농민들의 삶의 모습을 대변한다. 밀레나 사실주의 화가들의 등장 전까지는 노동자나 농민들은 예술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밀레에 의해 농촌의 농민들도 진정하고 건강한 모습을 통해 아름다운 예술의 주제가 될 수 있었다.

밀레의 작품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돼지잡기>이다. <돼지잡기>는 겉으로 보이는 농촌 풍경의 시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풍속화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곡물을 식량으로 삼은 지는 겨우 1만년 정도이다. 그 전에는 주로 수렵을 통해 육식을 선호하였다. 농경 사회가 되면서 산돼지는 기르는 집 동물로 변하였고, 인간사회에서 의례나 축제 등에 이용되거나 부족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기능하였다.

<돼지잡기>는 두 장정이 돼지 주둥이에 끈을 묶어 힘껏 당기고 있고, 뒤에서 돼지를 떠밀며 용을 쓰는 남자,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는 돼지에게 여물로 유혹하는 여인,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돼지를 지켜보는 아이들 등, 극적 순간을 리얼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농촌에서 행해지는 풍경을 그린 그림인데, 제주의 돗추렴을 연상시킨다.

제주의 돗추렴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돼지 한 마리를 사서 명절 등의 의례를 치르기 위해서나 가족들의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분육(分肉)하는 것을 말한다. 큰 돼지를 잡았을 경우, 내장이나 갈비, 다리, 다른 부위 고기 모두 돈을 낸 사람들 먼저 필요한 만큼 나눈 다음, 남은 고기는 동네 사람들에게 일정량 팔기도 한다. 또 돗추렴에 참여한 사람이나 이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에게 돼지 생간을 썰어서 맛보게 하고, '돔배추렴'이라고 하여 돼지의 한 부위를 삶아서 돔배고기로 소주 한 잔씩 하는 것이 돗추렴의 매력이기도 하다.

<여름, 밀 타작하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에서는 도리깨질하는 사람의 모습이 등장한다. 볕에 마른 밀을 부지런히 모아 운반구에 올려놓는 여인들의 바쁜 손놀림, 어깨에 이고 가는 여인, 날라 온 밀을 남자들이 빙 둘러서서 도리깨로 힘차게 장단을 맞춰 두드리는 모습이 우리 눈에도 익숙하다. 그리고 다 턴 밀짚은 따로 호크로 쌓고 있는 사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시랭이를 불태우는 여인의 모습은 제주의 농촌과 사뭇 닮아 있다. 제주에서 도리깨질로 장만하는 곡식 중 대표적인 작물은 콩이다. 초가을 햇살에 바짝 마른 콩 묶음을 멍석에 깔고 가족들이 역할에 따라 콩 타작을 하는 데 이때 장단을 맞추어 가며 도리깨질을 하는 것이다.

밀레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문화라는 것은 전파가 없이도 유사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농촌의 삶이나 제주 농촌의 삶이 서로 닮은 것은 농업이라는 산업의 기본 때문이다.

결국 밀레의 그림에 우리가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가 농부의 아들이자 농부로서, 땅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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