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사진가 서재철

 새처럼, 곤충처럼, 말처럼, 노루처럼 그렇게 다녔다. 흙땅을 누볐다. '한라산의 노루'라 불렸다. 그 남자. 그에게 제주도는 섬 전체가 다큐멘터리다. 날아다니는 새 부터 땅 속 굼벵이까지 찍었으니. 잠녀부터 눈보라 속 지들커를 등에 진 노인까지 수없이 많은 제주사람이 그에게 찍혔으니. 어디 그처럼 제주도를 카메라로 지켜낸 이 있을까. 한국사진기자상을 두 번이나 받았던, 한 시대의 기록자, 왕년의 사진기자. 퇴직. 8년전 가시초등학교 폐교에 그 다큐사진들을 확 풀어놓고 사진갤러리를 가꾸는 그는 우리곁에 가까이 있다. 60대의 영원한 기자정신 서재철. 지금도 청년의 의욕과 열정 그 자체인 사진가 서재철. 그다. 매일 두근거리는 화산섬의 아침을 맞고, 어둑 새벽 카메라를 챙기고 나서는 이사람. 오늘도 자신한테 마감할 무엇이 있는 건가.

 1947년 제주출생. 포토갤러리 자연사랑 미술관 관장. 제주도박물관협의회 회장. 1972년부터 언론계에 발을 담그기 시작 제주신문 사진부장. 제민일보 편집부국장을 역임하면서 제주의 생태, 자연, 삶의 모습들을 찍는 작업을 해왔다. 주로 글과 사진으로 자료집으로서의 가치와 기록성이 강한 작품집들. 「제주해녀」 「제주도생태 영상시리즈」 전 5권, 「한라산」 「한라산 노루 가족」 「한라산 야생화」 「바람의 고향 오름」 「날마다 솟는 성산」 「화산섬, 제주도」 등. 제주해녀전, 한라산 노루가족, 제주의 사계, 한라에서 백두까지 등 수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1991년부터 몽골에 관심을 갖고 10차례 이상을 드나들면서, 몽골에서 2회에 걸친 「제주풍물사진전」을 열었으며, 「몽골, 몽골 사람」(공저) 「이름 모를 소녀의 꿈」 작품집을 내기도 했다. 한국기자상(1979, 1994), 서울언론인상, 송하언론상, 현대사진문화상(창작부문), 대한사진문화상(보도부문), 덕산문화상 등 수상.

 # 신이 있다면, 나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한 것

 "사진한 것을 후회한 적도 없다. 신이 있다고 한다면, 나에게 다행스럽게 사진을 찍어라 한거다. 사진을 했기 때문에 무지하게 많이 배운거다." 그가 제주도에 태어난 것은 축복이다. 그 섬의 사진기자가 된 것은 축복이다. 제주도 또한 그를 만난 것은 축복이다.

 젊은날의 그때도 그랬다. 새벽 만수의 백록담을 찍고 마감 하고선 다시 바닷가로 향하던 치열한 기자였다. 그때 보았던걸까. 제주의 해안선이, 계곡의 아름다운 것들이 떠나가고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아름다운 포구가 시멘트로 곧 덮여 무너지고 말 것을. 실제로 첩첩 쌓인 필름들이 증거한다. "사실을 진실되게 기록하는 것이야말로 사진을 하는 첫째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간 펴낸 자신의 책이 귀중한 자료집으로 쓰이길 바란다는 그는 나의 오랜 왕선배 기자였다. 그런 나에게 그는 지금도 도대체 달라진 바 없는 사진기자다. 저 지독한 제주사랑, 지독한 버럭 열정. 그럼에도, 지금도 취재 못해 난리 치거나, 카메라 못 찾아서 발버둥치거나, 그런 꿈을 매일 꾼다니! 질리지도 않냐고?

 그는 우둔할 정도로 고집스럽다. "몇년전엔 높은오름을 일년중 한 두달만 빼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해도 매일같이 올랐어. 거기가면 뭔가 꼭 될 것 같았어. 그냥 내려오면 안될 것 같고." 하다못해 아내가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젠 좀 같은데서 그만 찍어도 될 거 아니우꽈. 하루 한날 찍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가 그랬단다. "자세히 보면 뭔가 달라. 구름 흘러가는 것도 달라."

 "70~80년대 흘러간 사진전을 하고 있는데 사진은 오래될수록 대단히 중요하다는 얘기를 늘 해요." 사진갤러리 자연사랑에 풀어놓는 그의 제주도 기록들은 모두가 생생한 다큐다. 낡은 교실 복도의 추억의 졸업사진코너가 가장 인기. 사람들은 까까머리 단발머리 유년을 발견하곤 '아하~'다. 이제 포토갤러리 자연사랑은 마을의 문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 신문배달 하며 익힌 길눈 밝은 다큐 사진가

 한라산. 사진의 시작도 그 산에서였다. 스무살 무렵, 친구와 갔을 때다. "관음사로 올라가는데 연산홍 꽃이 초록속에 화려하게 피어있었어요. 안개 빗속에 그 색깔이 얼마나 이쁘던지. 친구 카메라를 빌려서 생전 처음 찍어봤지요. 명함판 크기 사진을 만들어 봤는데, 그때 사진이 참 재밌는거구나 했죠." 두근 두근. 사진관에 가서 카메라를 빌려서 찍어봤다. 그야말로 카메라가 처음 발명돼서 참 신기해 했을 때의 느낌! 삼형제 중 둘째. 어머니와 파란만장 삶을 살았던 아버진 육지에서 장사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랄 때였다.

 어려서 안해본 일 없다. 고모를 도와 시장에서 야채장사도 했다. 아이스케키장사, 신문배달…. 거기서 삶을 배웠다. 이제 잊을만한데, 엊그제도 그런 꿈, 꾸었단다. "신문배달을 하는데, 골목 구석구석 남의 집 찾아갔어. 검정고무신 신었어. 겨울인데 눈이 녹아. 길이 벌착한데 신문 갖고 뛰어다니다보면 발에서 김이 모락모락해요. 고무 신발은 찢어지면 꿰매 신는 거라." 그렇게 뛰어다닌 덕에 길눈이 밝아졌나 생각한다. 그리 모은 돈으로 카메라를 샀다.

 "니코라는 카메라였는데 어느날 슬리핑백에 감춰둔 그것이 도난당한거라. 크로바사라고 사진관에 가서 계속 빌려서 썼어요. 그때 거기 이장화씨가 사진을 보고 잘 됐다 안됐다 해. 노출이 수동이니까." 1968년. 제주카메라클럽 사진 전시. 오라리 하천가로 눈속 보릿짚 진 사람이 지나가는데 '귀로'라 붙였다. 우연히 제주신문사 김선희 사장이 전시 구경을 왔다가 "누가 찍은 거냐?" 발탁됐다.

 # '한라산의 노루' 환경지킴이 사진기자로

 사진? "그야말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하나 남기는 과정일 것"이라는 서재철. 해녀부터 담기 시작했다. 고무옷 나온다 해서 팬티스타킹 입고 다닐때 되니까 그만 찍어야 되겠다 생각했다. 포구로 눈을 돌렸다. "카메라 고발거리나 파괴 현장같은 것 많았어요. 구엄에서 중엄까지 걷다보면 해안가 토석채취 무지해요. 그것을 깨서 항만공사를 하는거라." 현장은 굉장한 기사거리였다.

 '한라산의 꽃' 연재 때였다. "마이크로 렌즈가 있어? 접사렌즈가 없으니까 클로즈업 필터를 끼워가지고 찍었어. 매일 한라산에 가다보니 자연파괴 현장이 눈에 들어와. 나무 하나 잘렸다하면 대서특필. 사진 찍고 기사 써서 실리면 기분이 좋았지. 한라산을 온통 찍었어." 심지어 산악회 회원들 동원해서 어리목에 현수막 걸었다. '인간 송충이 몰아내자'. 한라산 나무 도채꾼들을 서늘하게 했다. 회원들과 탐라계곡 등반로 보수하고. 쇠줄로 묶어냈다. 1979년도 초 한국기자상 신청하라고 했다. 보도된 한라산만 한보따리. 사진기자가 한라산 파괴현장을 찍은 사진보도부문으로 받은 것. 기자로서 최고의 상이었다. 의무감이 솟았다. 한라산을 지켜야했다. "한라산 보도 파괴현장 나가면 중앙에서 시끄러워. 국립공원 청원경찰들한테 매일 서재철 뒤쫓아 다니라고 해." 허나, 한라산 노루. 그의 잰걸음을 따를 국공 청원경찰이 없었다.

 "군보충역 시절, 군대용 라면을 주면 그것이 자꾸 쌓여가요. 곰팡이가 슬정도로. 슬라이드 필름이 그처럼 서랍마다 죽 늘어나는게 꼭 돈이 늘어나는 것 같아. 필름 값만해도 어마어마한데. 도서관의 장서가 늘어나는 기분이야. 몇십만커트라고 말할 수도 없어."

 남들이 눈을 돌리지 않았을 때 제주도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다행스럽다는 사람. 남들이 버리는 사진이라도 그것을 자료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모아뒀단다. "그것이 먼 훗날 좋은 기록사진이 된다. 사진이 갖고있는 매력의 하나는 기록이죠."

 # 몽골에 반해 10년 넘게 다녀

 기자 초년생인 1974년 초겨울, 성산포에 황새가 날아왔다했다. 본 적도 없는 새를 찍으러 달려갔다. "양어장 가운데 보니까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어. 건너갈 수가 있나. 멀리서 찍으니까 요만한게 나와. 누가 오더니 '고니'우다. 황새는? 조금 있으면 날아옵니다. 눈보라는 치고, 혼자 하염없이 앉아 있는데 정말 우아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가만히 앉아. 마감시간은 닥쳐오고. 할수없이 200㎜ 렌즈에 팬티만 입고 그 물속으로 살금살금 들어가서 찍고 마감시켰지." 그후 다큐멘터리 새를 찍기 시작했다. 몽골에 반해 10년 넘게 다녔다. 몽골사람이 몽골에서 필요한 사진을 구하려면 그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정도.

 야전군처럼 누비다보면 등골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아찔한 순간들, 왜 없으랴. 몽골에선 하루에 세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테우탐사 취재하다 죽을뻔, 한라산 취재때 떨어져 손톱 발톱 피 잘잘하면서도 주변 다 찍고, 한라산 정상을 올랐다는 지독한 기자. 기자가 해야될 의무를 철저하게 했을 뿐이란다.

 # "제주사람들이 제주의 가치 몰라요"

 그는 늘 이 대목에선 목소리가 높아진다. 환경문제. "주민들이 제주를 보존하고 보호하고 지켜야하는 자세가 있어야해요. 물 아껴써야 해요. 화산섬에서 지하수 뽑아 수출? 그 돈 갖고 지표수 관리할 수 있는 시설 만들어줘야죠. 석주명 선생이 지하수 개발하라고 하지만 이렇게 쓰라고 한 말 아니야. 지하수는 먹으라고 한 물입니다. 제주에 있는 것 고스란히 잘 지켜졌을때 제주도를 보러오지 제주도 빌딩 보러 오지 않아요. 제주도의 밭담, 무덤, 100대 오름정돈 철저히 보존해야 해요. 김수남의 책 제목 '변하지 않는 것이 보석이 된다' 얼마나 맞는 말인가요."

 제주도가 세계7대 자연경관에 뽑혔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는 그가 그런다. "미국 중국 몽골 좀 다녔지만 제주도만큼 작고 아기자기하게 이뤄진 곳은 없어요. 펠레라는 화산의 여신이 이 지구상에서 화산섬을 이렇게 만들어준 곳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죠. 땅속 동굴, 해안가, 엊그제 화산활동 한 것처럼 만들어졌지. 그렇게 자연유산으로 지정되면 보존 시켜주는 거라. 함부로 못하잖아요. 후세에 물려줄 제주도를 지켜야해요."

 35㎜ 디지털도 쓰지만 지금도 필름을 쓴다는 서재철. "나에게 평생 사진은 떠날 수가 없죠. 의무같은 거죠." 그의 꿈? "갤러리를 잘 지켜가는 일, 사진을 자꾸 바꿔서 전시하고 싶은 것, 그동안 찍은 필름이 잘 관리가 되서 잘 쓰여졌으면 하는 것. 상여니 뭐니 전 분야의 사진들인데 저것들을 쓰지 않으면 쓰레기가 되지요."

 가난한 기자. 사진만 찍었는데 1남3녀, 잘 자라줬다. 새벽이면 한라산 오르고 사진의 삶을 사는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물린 막내딸('월간조선' 서경리)은 사진기자를 계승했다. 순전히 그의 아내 백영희가 없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 자식교육부터 수없이 많은 필름을 정리해내는 성실한 조수이기도 한 동반자. 그런 아내에게 늘 큰 소리를 치지만 미안하단 소리 한번 못했다는 이 열혈의 사진가.

 한 남자가 풀을 뽑고 있다. '학교종이 땡땡땡~' 곧 울려퍼질 것 같은 폐교의 작은 종 아래서. 거기에 가면 흑백의 추억이 있다. 그 폐교에 가면 한때 한라산 구석구석 카메라로 고발하던 화산같던 그 기자, 서재철이 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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