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해녀의 노래' 작사가 강관순의 딸 우도 잠녀 강길여
연둣빛 항일의 섬 우도. 이 섬엔 역사가 된, '해녀의 노래'가 흐릅니다. 우도 천진항 선착장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에 새겨진 그 노래. 한반도, 일본, 중국까지 떠나던 해녀들 마음의 위안이던. 미완의 혁명가 아버지의 노래입니다. 아버지 떠난 길에 태어난 유복녀. 잠녀(해녀)가 됐습니다. 어머니 역시 상군 잠녀였지요. 너른바당 뱃물질 거침없던. 일제강점기, 아버님은 사상 유례없는 잠녀 투쟁을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로인해 갇힌 몸 되었습니다. 옥중 '해녀의 노래'는 그때 태어났습니다. 우도 잠녀 강길여. 푸르른 나이에 떠난 독립운동가 강관순의 딸. 바람불고 비오는 날엔 더 그리워진다는 아버지의 노래, 해녀의 노래를 불러봅니다. 어머니가 부르던 그 노래 불러봅니다. "우리는 제주도의 가이없는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물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딸 하나와 살던 그녀의 어머닌 65세까지 무레질(물질)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장만한 그 집 앞마당, 전을동 바닷가. 도내 거물급 항일인사들이 드나들던, 역사의 바다입니다. 거기엔 '해녀항일운동의 비밀본거지 강관순의 생가'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아버지, 저 왓수다'하면서 매일매일 물질허염서마씀."
# 일제강점기 민중계몽운동 앞장 선 아버지

아버지 강관순. 일제강점기, 우도에서 태어나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수재. 동아일보 주재기자. 고향에서 민중계몽운동과 영명의숙 교사로, 야학 교사로 활동하다 '혁우동맹'의 핵심인물이었던 사람. 당시 개혁파이자 선두에 섰던 우도 신재홍의 집은 경찰지서와 가까워서 항일투쟁 회의는 주로 천진동 강관순의 집에서 이뤄진 것. "중심에 섰던 신재홍 어르신이 그렇게 사랑해주셨대요. 동생분한테 메모지로 연락하게 했습니다. 김성오 어르신은 이웃집이어서 가장 친하게 지냈습니다." 신재홍, 김성오, 강관순. 이른바 우도의 3천재라 불린 그들이다.
"어머님이 숱하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가 세화리 가면 김시곤, 하도리 가면 오문규·김순종 어르신네 집에서 함께 활동하셨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우도에 오면 우리 집에 오시고, 우리 아버지는 그분네 집에 가면서 친하게 지내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문규씨가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하셔서 안타까와예."
# 해녀 항쟁 참여하러 풍선 타고 가던 어머니
그녀의 어머니도 잠녀였다. 어머니도 그 복판에 있었다. 1932년 국내 최대규모 세화리 해녀투쟁 때 우도해녀들 대부분 떠날 때였다. 물수건 쓰고, 호미 안고, 풍선 타고 갔다. 비장했다. "일본 사람들이 배에 함께 타니까 방망이로 해녀들을 마구 때릴려고 하더래요. 그러니까 호미 들고 같이 대항하면서 갔다고. 물수건, 속곳, 작은 눈 쓰고. 비창 들고. 그때 강창순이란 우도해녀는 연설도 잘 했고 남자 못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8남매의 둘째딸. 열여덟에 어머니가 결혼할 때, 아버지는 열여섯이었다. 결혼할 때 친정에서 소 한마리 주니까 데리고 왔던 어머니는 물질하랴 밭일하랴 독립운동 뒷바라지에 쉴 틈 없었다.
농업학교 끝나고 돌아온 젊은 아버지, 일제는 자꾸 저울눈을 속이고 있었다. "어머님이 해산물을 생산해오면 저울눈도 속여서 제 값을 쳐주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이 그것을 직접 보니까 이래선 안되겠다. 너무 억울하다. 저울금이라도 알게 해야겠다고 야학소를 했다 헙디다. 아버지는 국어 산수도 가르치고 연극도 했죠. 나중엔 어머님도 해산물을 받으면 숫자를 썼고, 문서 같은 것을 읽어서예."
어머니는 이러한 아버지를 어린 딸에게 들려주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똑똑하고, 얼굴도 좋고, 농촌을 계몽시키려고 노력해온 사람이라고. 일제땐 주동인물로 해서 곤욕을 많이 치렀다고. 어머님이 귀에 익도록 하셨수다. 세화리 하도리 어른들 오면 같이 오고 가면 같이 가면서 주동이 됐다고. 고성화씨는 아버지 후배여서 많이 아껴주셨다 합니다."
# 객지서 3년 투병한 아버지…고향 생각 깊어
"어머니가 죽을 고생을 허엿수게. 면회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엇수다. 아버진 면회가면 그저 다른 말씀은 안하시고 돼지고기 조금해서 갖고 가면 소가 되새기듯 씹어 삼키시더라고 하십디다." 해녀투쟁 이후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은 아버지가 광주 형무소에서 복역할 때였다.
"그때 '해녀의 노래'가사를 담배개비에 둘둘말아 오문규씨 부인한테 전해줬답니다. 4절에 '배움없는…' 가사 때문에 금지곡이 돼서 부르지 못했다고. 저는 어머님이 부르는 걸 따라서 배웠지요."
1936년 만기 출옥. 귀향한 아버지는 심한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일경의 미행도 심해졌다. 옥중 동지 김성오와 함북 청진으로 떠났다. 거기서 희망을 보리라. "선장시험에 합격했지만 병에 걸려서 3년동안 앓기만 했답니다. 김성오 어른은 외국 갔다와서 아버님 돌아가시니까 대성통곡을 했답니다. 아버지는 잠녀들이 생산해낸 물건도 제값을 받지 못하니까. 우도에 학교를 세워야 되겠다고 걱정걱정하다가 돌아가셨다 합니다."
우도에서 큰 딸을 잃은 아버지는 또 여섯 살의 오빠를 청진에서 잃어 상심이 컸다. "오빠가 여섯 살에 홍역에 돌아가셨는데 유리로 창문을 끼워 놓잖아요. 아들을 맘대로 안아보지도 못하니까 아들이 보고싶다하면 어머니가 유리로 아들을 안고 가서 보여주셨대요. 문을 열지 않고. 아들이 죽으니까 더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
서른 다섯의 아버지가 떠나자, 만삭의 어머니는 홀로 고향을 향했다. "유해를 화장하고 친구분이랑 같이 왔지요." 문학청년 강관순. 그는 도사가 직접 오면 그 앞에서 건의문을 쓸 정도로 문장가였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해녀의 노래'외에 다른 글은 없었을까. "유품을 정리하고 오다보니 아마 그때 사라진 것 같습니다."
# 여덟살부터 물질…자연스럽게 배워
잠녀 강길여. 여덟살 때부터 물속곳, 물적삼 입고 무레질. 열 살때부터 두렁박 찼다. "초등학교 6학년땐 천초 해체하는 기간에 학부모들이 학교에 가서 아이들 조퇴하게 해달라고 하면 조퇴해서 무레질 헤십주. 어머니하고 같이. 자연으로 허게 되어예."
젊어서 충청도를 누비고, 일년 6개월씩 홍콩 출가물질도 3년 다녀왔다는 그녀. 어머니만큼은 못하지만 중상군이다.
그녀는 요즘 거의 매일 물에 든다. "일년 사계절 다 들죠. 천초 해놓고 패류 따러 들어가고. 바닷것은 시기에 따라 달라요. 우뭇가사리, 고장초란건 잡촌데 그거하고. 조금 있다가 오분자기, 소라, 겨울되면 성게헙니다." 물질이 끝난 자투리엔 땅콩밭으로 간다.
한때 15 정도 잠수하던 그녀, 이젠 절반정도에서 그치지만 그녀의 바다는 또 하나의 집이다. 물질? 퇴직없는 직장아닌가. "자기대로 남한테 간섭없이 벌어서 살 수 있고, 노력한 만큼 나오니까."
# "앉아서 외국 볼 수 있는 세상 열린다 했죠"
그녀는 '해녀의 노래'가 조금씩 틀리게 나오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 "'조선각처'가 아니고 '기울산(기장 울산) 대마도로 돈벌러 간다'가 맞다. 어머님한테 들은 것으로는 이게 맞아요."
한번도 뵌 적 없는 아버지지만 그래도 독립유공자였구나 생각하면 자랑스럽다. 칼칼하던 시대가 짐작된다. "아버진 앞으론 여기 앉아서도 세계를 볼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했어. 아이고 이렇게 할려고 그랬구나 요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도에 대한 사랑도 아버지 못지 않은 딸. "이웃 정이 좋아요. 지금은 우도가 많이 발전하고 편해졌지만 우도 잠녀들 전부 강인하게 살아왔습니다. 하루라도 놀면 못살아요."
물질 60년 강길여. 어릴 땐 꿈 가질 틈도 없이 살았던 것 같다. 하루 하루 생활하다보면. 당연히 가는 건가 그랬다. 돌아보니 속절없이 산 것 같기도 한 세월이란다. 애잔한 눈빛, 허나 단단한 가방속에 모신 아버지의 자료를 펼치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만의 견고한 기품이 흐른다.
# "당시 여자들 항쟁을 생각하면 장하지요"
"아버지가 독립유공자 된 것이 내 생애 가장 큰 보람입니다. 어머님 때는 이렇게 될 줄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는 2005년도에 독립유공자가 됐다. 독립유공자로 되는 과정도 어려웠다. 사망년월일이 불투명하다고 보훈청이 난색했다. 친족이자 언론인 김순두씨가 앞장서서 호적 바로잡는데 힘써줬단다. 자료수집에 애써준 김찬흡씨, 김점근씨, 고향의 고성화 어르신 등 주위분들 모두가 고맙기만 하단다.
"당시에 해녀들 항쟁을 생각하면 장하다는 생각 뿐입니다. 일본사람들과 맞서 대항하는게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그때 같았으면 분하고 억울하면 그럴수밖에 없었을 거지만. 그래도 그렇게 대단한 힘이 어떻게 나왔는가 몰라마씀."
소처럼 길게 드러누운 섬 우도. 그 바다엔 서슬퍼런 시기, 희망을 도모하던 젊은 역사가 꿈틀거린다. 한때는 몸을 뒤틀던 격동의 바다, 역사의 바다다. 그 위로 한낮의 바다가 작열한다. 역사의 아버지, 그 기념비 앞에선 딸이 그런다. "앞으로도 죽는날까진 무레질 하겠지."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