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제주인생활사 연구자 이지치 노리코

  아무리 갚아도 모자라다했다. 제주삼촌들한테 받았던 그 깊은 정을. 그러한 제주삼촌들 마음처럼 제주도가 그렇게 있었으면 했다. 아무리 변해도 공동체 마음만은 남았으면 좋겠다 했다. "기꽈?" "무사마씀?" 한국말은 제주어 '헷수다'부터였다. 제주말이 표준어보다 훨씬 수월하다는 여자. 그에게 제주도는 또하나의 고향. 1년 이상 더불어 살던 행원삼촌이 그를 가족으로 품은지 17년이니 그럴법도 한 일. 그 역시 그들을 어머니, 아버지라 부른다. 재일코리안, 제주인들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일본 문화인류학자 이지치 노리코. 삼촌들과 물질도 하고, 당근밭 마늘밭 일도 했던 그를 아는 이들, 그에게 '일본딸 와시냐?' 그런다. 수시로 드나드는 제주도. 이번 방문은? "어제가 행원어머니 기일이라난 마씨." 술술이다. 이 여자. 이미 전생이 제주의 딸 아니었을까.

 1966년 효고현 출생. 신호시외국어대학을 나와 대판시립대학대학원 박사. 에히메대(愛媛大)에서 10월부터 대판시립대학문학부 교수로 옮긴다. 1998년 당시 일본인 학자와 재일동포 연구자들이 모여 만든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모임'의 멤버. 논문 및 저서로  '재일조선인의 이름', '생활세계의 창조와 실천-한국 제주도의 생활지', '재일코리안사전', '일본제국과 국제사회학', '식민지주의와 인류학'. "한 주제를 갖고 오래한다"는 그는 6년 정도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재일코리안의 생활사를 연구한 후 1994년 8월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서 1년 이상을 살면서 마을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앞으로 제주의 공동체에 대해서도 연구할 계획. 일본에서 만난 제주 출가해녀는 30명. 그들의 이동사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혼저 갑서' 서울서 택시 타면 제주말부터 나온다. 제주도를 사귄지 오래된 현장 연구자 이지치 노리코. 학계에서 그는 제주어로 말하는 학자다. 제주도 사투리? "재미있어마씨." 아기가 처음 말을 배울 때처럼. 그가 느낀 제주말. 감정이 실리지 않고선 나오지 않는 언어. 자분자분 작던 그의 말소리도 커졌다. 바람속에서 크게 부르는 제주삼촌들처럼. "제주말은 소리가 크잖아요. 조사할 때도 제주말로 하니까 더 친근감 있게 다가와요. 내가 진짜로 말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는 제주말로 할 때예요. 문제는 강연할 때지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까봐서요. 후후."

 행원리 진입로에선 "아! 다왔다" 안도가 나온다. 흡사 고향 올레 들어서는 것 같다는 그다. "그디(거기) 가면 잠 잘 수 있다는 거죠." 삼촌들과 얘기하다보니 반말이 많다고 미안해한다. 재일코리안의 생활사를 조사하기 위해서 아예 그들 속으로 들어간 이지치 노리코. 그에게 베풀어준 행원 삼촌들. 그들 덕분에 제주가 연구의 테마가 됐고, 그로 인해 교수가 됐다. 그 은공 어찌 다 갚을까. 우연히 인연 맺은 행원 어머니가 세상 뜰 시기엔 그도 자식처럼 병상을 지켰다. 제주도와의 깊은 인연만큼 슬픔도 컸다.

 # 당근밭, 물질, 동네 삼촌들과 수눌음도

 94년 여름이었다. "안녕하세요" 한마디밖에 모르던 그가 제주속으로 들어간 것은.  "그냥 부딪치다 보면 어느정도 할 수 있을 거다 생각했어요." 며칠후, 지금의 '제주 아버지 어머니'를 소개받았다. "옛날 집 비워있으니까 써도 된다. 제사 때만 쓴다고."

 기둥엔 '대정 14년(1925년)' 쓰인 슬레이트집. 식민지시대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란다. "그때 자식으로서, 연구자로서 받아줬기 때문에 제주도에 있을 수 있었어요. 너무너무 감동했어요. 아버지, 어머니 하라고 했고, 나도 그랬어요."

 6개월 지나 처음엔 "누구누구, 뭐하러 왔냐"던 마을 사람들, 문을 열어줬다. 제주사람 집마다 일본과 관련되지 않은 집 없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일본 어디어디서 태어났다는 삼촌들도 있었다. 지나가다 '노리코 뭐하멘?' '추우니까 굴묵 땐다'하니까 '불쌍하다. 여긴 그런 사람 없어'. 일본 왔다갔다하는 해녀 삼촌이 '일본에서 사온 전기장판 빌려줄게' 했어요".

 행원 어머니가 수눌음 갈 때는 따라 갔다. 당근밭 마늘밭에서 검질메는 생활도 했다. "당근밭은 열흘 정도 갔어요. 하루에 2만원 받고. 생활속에서 인연 맺고 그런 것들 1년 10개월 지나면서 이제야 알게 된거죠. '다음에 우리 밭에 옵서예' 하면 어머니 따라 가고. 외부사람이지만 밥도 같이 먹고 하니까 서로 이야기가 되잖아요. 삼촌들은 뭐하러 온지 모르지만 그래도 좀 재미있는 아이가 있다. 인정해주는 거예요. 엊그제 쯔루하시 있다왔다는 삼촌도 있어요. 그러면 그 이유가 뭘까? 누구한테 가고 어떤 일을 할까? 살면서 조금씩 알게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들의 공동체에 주목했다. "일본에서도 제주사람끼리 공동체 만들잖아요."

 물론 장례식때는 팔 걷어부치고 설거지도 했다. 그런 그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일년 살다가 귀국, 다시 행원으로 돌아왔을 때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았을까 걱정했다는 노리코. "막상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눈물이 나왔대요. 두 번이나 안온다고 생각했대요. 너무 고생해서." 그의 눈에 물기가 어린다.

 행원아버지는 이야기를 너무 잘했다. 4·3의 상처가 많이 깔려 있던 집. 뒤늦게 4·3 책을 읽고 받았던 충격도 떠오른다. "각 집의 역사까지 상세하게 저한테 설명해 주시니까 저도 얼굴 보면서 대충 그렇구나 이해했어요. 4·3을 넘어가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래도 우린 살아가야 되니까 그랬겠죠."

 #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재일코리안 관심사로

 사회차별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소녀였다.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의 잦은 근무지 이동 때문에 자꾸 학교를 바꾸다보니 외톨이 느낌. 그 영향 탓일까. 소수자에 관심이 많았다는 이지치 노리코. 영어를 전공하던 그가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24년 전. 중국에 갔을 때였다. 난징 박물관에서 대학살을 봤다. 충격적이었다. 아시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일본국가가 현대사에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 쓰고 싶어서 교수한테 상담했다. 재일 코리안의 생활사 첫 주제 '귀화'. 아무것도 모른 때였다.

 민중의 모습, 보통사람의 삶의 모습에 관심이 갔다. 졸업논문 쓰면서 몇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 "당시는 재일교포 안에서도 귀화는 안되는 거였어요. 그분들도 마음 아픈 이들도 있었어요. 국적은 일본이지만 원래 한국사람이죠. 보통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이쿠노구 어머니학교라고 글 가르쳐주는 학교에 갔어요."

 웬걸, 이쿠노구엔 제주사람들이 많았다. "제주역사와 오사카와의 관계를 공부하니까 이랬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책도 없고 논문도 몇 개 없었어요." 이쿠노구에 살며, 5년동안 한 할머니와는 가까운 인연을 맺기도 했다. 생활사를 알려면 직접 제주도로 가야했다. 신간사 고이삼씨에 편지를 썼고, 제주도 지인을 소개받았다.

 # 독도는 한국땅, 학생들에게 교육통해 전해줘

 그 역시 한일관계가 불거지면 껄끄럽다. 제주 행원에서의 말없는 약속 같은 게 떠오른다.
 '조선어 사전' 보다 '한국어 사전'으로 가져가야 할 것 아닌가 생각까지 할 만큼 과거의 역사 때문에 신경 썼었다는 이지치 노리코. 당시 행원 90대 할머니의 말씀.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처녀였던 때는 여기가 일본이었고, 나도 일본에 갔다 왔고 역사에 그런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랬어요." 다른 삼촌도 그랬다. 해방전 국교 다닐때 교사가 일본말만 시키고 고생도 많이 했다. 4·3 일어나서 고생하곤 했는데 나중에 선생되면 학생들한테 꼭 가르쳐야 된다고.

 그의 수업을 듣던 한 학생이 물었다. "언젠가 독도 조례 만드는 현인 시네마현에서 온 학생이 독도는 어디땅이냐고 물어요. 일단 역사적으로봐도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나와 있으니까 그것은 우리가 알아야된다. 그리고 싸움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하자. 어떻게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 방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 안했어요. 부담스럽죠. 그 모순을 학생한테 말해야잖아요. 그 차이가 뭐냐. 지금 학생들이 너무나 유리한 조건에서 살아오니까 못 느끼고 모르는데 그것을 교육에서 전해줘야죠."

 # 제주해녀, 가능성에 건 사람들

 "일본에도 '아마'가 있지만 여기는 큰 직장이잖아요. 일본에서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고. 잠수만 아니라도 다른 일도 선택할 수 있어요. 혹시 못해도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고. 여기서는 정말 큰 직장이예요. 지켜야되고. 또 많이 잡아야되고. 그럼 자연 환경 쪽에서도 의미가 있고 노동 환경 속에서도 의미 있지요."

 그런 느낌을 접한 것은 그도 함께 물질에 나섰을 때였다. 어촌계장, 해녀회장 찾아가 겨우 허락받고서였다. "서로서로가 도와주고. 옷 입는 것부터 도와줘요. 재미있으니까 구젱기(소라)가 보인다해서 들어가잖아요. 가면 좀 깊어. 거긴 위험하다. 소리를 못하니까. 잡아당기고. 자기 작업을 하면서 저를 보고 있는 거예요. "

 궁금했다. 그 옛날 대륙을 향한 출가해녀들, 그 힘은 어디서 나왔던 걸까. "'해봐야 알겠다'에 거는 도전정신. 가능성만 보이면 저항이 없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닌, 조건이 없으면 어떡할까가 아닌, '해봐야 알겠지'다. "너무 멋있죠. 자기가 가능성을 구체화하겠다하는 정신이랄까, 힘이랄까 대단해요. 자기 노동환경 관리 지혜도 대단해요. 또 배려의 마음. 혼자 노동할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 같아요. 밭에서도 그렇고. 제주도 여자들이 어느 면에서는 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20세기는 일단 강하게 살아야하는 시대였으니까. 강하게 되면 약하게 못하잖아요."

 허나 앞으론 제주해녀들의 일본 출가물질이 어려워질거란다. "바다밭 권리를 안주겠다고 불법이다라고 하고 있어요. 재일동포는 괜찮지만. 어떤 쪽에서는 어협이 다르기 때문에. 미에현 밑에 쪽, 위 쪽은 막는 곳 있어요."

 "옛날 삼촌들 마음같았으면 해요." 요즘 강정마을 문제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오사카에서 강정문제를 알았다. "제주도에서 강정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보는데, 4·3을 겪은 사람들의 땅에서 자기의 생각 속에서 연결시켜야한다고 봐요. 지금은 안보이니까 모르지만 제주도의 미래가 걸린것이니까요."

 앞으로 주목하는 주제는 제주의 공동체문제를 현대사회까지 쓰고 싶다. 남편도, 자신의 일본 부모도 그렇게 사랑하는 제주땅이다. 초가을 쌉쌀한 초록아래서 시종 제주말이 다감한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 일본으로 떠나는 순간 다시 그리워지는 또다른 고향. 그리워서 어찌할까.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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