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재일동포 피아니스트·작곡가 양방언

 뼛속까지 다감한 감성의 소년이었다. 음악은 마력처럼 소년을 사로잡았다. 그 소년, 음악을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원하던 의사가 됐고, 의사가 돼서 끝내는 그 길을 향해 걸어 간다. 경계의 재일동포 음악가 양방언. 그는 제주도가 특별한 곳이라 했다. 알면 알수록 제주도의 매력에 더 깊이 빠진다했다. 하지만 제주섬이 평화로웠으면 한다고도 했다. 사무치게 그리던 아버지의 바다. 그의 시선이 제주바다로 향한다. 밀려오는 파도의 푸른 힘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일까. 그는 동서양 음악,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고, 장르와 장르를 초월한다. 사람들은 그를 멈추지 않는 뮤지션, 당대의 뉴에이지 음악가라 말한다. 오랜만에 제주를 찾은 그를 만났다. 맑은 감성이 뚝뚝 흐르는 이 음악가. 내내 미소로 답했고, 경쾌했다.

 지루한 건 못 참지만, 낡은 피아노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 늘 다음 음악을 궁금하게 만드는 뮤지션. 그가 원하는 건 더 신선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는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아니고, 단정한 단풍나무이다. 그의 인생과 음악은 소나무와 단풍을 지나 깊은 숲 속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 이는 그의 인품에 반했다는 사진가 배병우다. 반듯한 한국어, 그와의 대화속에서 그가 살아온 질감의 세계가 느껴진다. 뮤지션 양방언. 그는 제주에서 깊은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1960년 동경 출생. 전직 의사이며 음악가. 니혼의과대학, 동경예술대학원. 제주가 고향인 아버지와 신의주가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 일본, 홍콩을 포함한 아시아는 물론 영국, 독일 등 유럽에서 작곡가, 연주가, 프로듀서로 활동. 클래식, 락, 월드뮤직, 재즈, 게임음악 등 장르를 넘어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크로스오버 뮤지션. 일본 애니메이션 음악감독으로도 유명한 그는 NHK 다큐멘터리 '일본과 한반도 2000년'의 음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주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프린스 오브 제주'는 걸작. 드라마 '상도'(메인 테마)와 다큐 '도자기', '차마고도', 애니메이션  '천년여우 여우비', 영화 '천년학' 등의 음악감독 등을 맡아 많은 국내 팬들이 있다. 저서 「프런티어, 상상력을 연주하다」.
 # '공존공생' 아버지의 바다

 '그 쪽'이 그에게로 오는 것을 '봤다'. 유년의 귓가에서 늘상 출렁이던 아버지의 제주바다. 저 멀리서, 생각하기도 전에, 상상력을 넘어서 그에게 오는 것을 '봤다', "맨 처음 본 제주바다에서 자연스럽게 악상이 떠오르고 보였어요. 들렸다기보다 작품의 모습이 명백히 보였어요. 중문 정원에서. 아주 신기하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았고 반가웠죠. 큰 힘을 얻은 거죠." 걸작이 된 곡 '탐라의 왕자'는 그렇게 왔다. 1998년 6월이었고, 가족들과 함께였다. 한국적으로 국적을 바꾸고 난후 비로소 만난 아버지의 고향 협재바다. 고왔다. 술 취해 들어오면 고향 이야기를 하던 아버지. "아,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비양도를 드디어 만났구나." 그토록 오고 싶어하던 아버지의 바다 아니던가.

 재일 1세대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다. "기본을 잊지 마라. 우리들이 한국 사람임을 절대 잊지마라. 잊지마라! 제주도를. 우리 말을 해야 한국사람이라고. 교육에 대한 열정도 컸죠. 많이 공부해서 밖으로 나가라고. 우리는 지금 일본에 살면서 공존, 공생해야 한다. 자기들만 좋으면 안된다. 그런 점에서 아버님께서는 의사 직업을 통해 동포들한테는 무조건 해주셨죠. 그것을 일본사회, 일본사람들한테도 잘 돌려줘야된다. 그래야 우리들도 같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런 것을 강조했어요."

 아버지는 모두 클래식 음악에 깊이 빠져있던 다섯 형제를 의사나 약사로 키웠다. "그러면 일본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겠다. 그 공존 위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런 영향이 좀 컸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일본사람들한테도 잘 해주는 거예요. 그런 것을 보면서 자란 것이 말을 많이 듣는 것보다 훨씬 속으로 들어갔다할까 그래요." 치과의 자격을 얻은 직후 이것은 좀 모자라다해서 다시 의과대학에 들어간 아버진 민족학교 설립의 중심인물이었고, 가난한 지역주민들에겐 무상으로 진료를 하기도 했던 이였다.

 어린 양방언에게 제사 때면 들려오던 제주도 사투리는 투박했다. 그는 제주의 아픔을 이해하고 싶다. "아버님도 제주도 4·3사건에 대해서는 공부해서 알아보라고 했어요."
 양방언. 그의 가슴 속에는 커다란 구멍 하나가 산다. 의사가 되었으나, 결국 집을 나왔고, 홀로 음악의 길을 갔다. 하여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음악이 그를 당겼다. "순응적으로 배울 땐 관심이 없는 거예요,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세게, 깊게 빠졌던 것 같기도 해요. 그 당시는 음악을 한다는 것, 밴드를 한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아버진 밴드 한다는 것을 절대 밖에서 한마디도 하지마라 했죠. 클래식이면 좋은 거예요. 근데 밴드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 재일동포 경계인…"비극은 아니다"

 "잘못된 아들이었죠. 음악을 하는 것에선 후회는 없지만 아버님에 대해선 미안함, 아픔이랄까 있죠. 제 자신 안에서도 아픔이 있어요. 의사를 하는 것이 맞는 인생은 아니다. 안 그러면 음악으로 가자. 그런 결단이 나왔을 때는 오히려 상쾌했어요. 그때까지는 학생시절 너무나 고민이 많았어요. 졸업해서 의사 면허 받았을 때 바로 음악으로 갈까. 바로 의사로 갈까. 언제나 고민만 하고 있었어요. 고민도 그때는 큰 것을 희생으로 해야 되었지만. 어느 방면에서는 영혼이 해방된 거예요. 다 좋은 것은 없는 거예요. 인생이란. 이쪽을 희생한 만큼 보답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한다는 거죠."

 고향은 고향이지만 살았던 곳도 아닌 고향 제주. 그에게 재일동포란 어떤 존재일까? "당연히 경계인이죠. 어느 면에선 어디에 있는 건가? 집시에 가깝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우리의 영혼이 어디에 있나하는 거죠. 그런 부분에서 고민은 아마 당연하게 많이 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어디서 왔는가. 어디 있는지 하는 것 말이죠." 

 양방언. 그는 그러나 그것이 비극적이지는 않고, 비극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당대 뉴에이지 음악가로 부르는 그의 힘이 아닐까. "그런 차별이나 그런 것도 본인이 비극적으로 되면 다 비극적으로 돼버리는 거예요. 제 성격일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그 순간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너무 재미없어요. 사실 제 주변에 그런 사람들 많은 거예요. 그런 얘기를 해버리면 싸움이 돼버리는 거예요. 차별 고민으로 마음 아파하면. 그 사람은 그 사람 인생이고, 저의 경우는 아닌 것으로 살아가면 좋고. 오히려 그런 부분을 힘으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제주도 신화, 멋진 애니메이션 만들면 세계화

 양방언. 이제 10년의 한국 무대. 그의 공연엔 수많은 팬들이 열광한다. 제주를 오가며 작업하는 일도 꽤 된다. 영화 '천년학' 촬영 땐 제주오름에도 올랐다. "올 때마다 인상이 달라요. 용눈이 오름 언덕같은 곳은 평소 못 가지만 역시 제주도의 깊이라 할까. 우리가 모르는 제주도가 참 많구나. 좀 더 알고 싶게 되기도 하죠. 올레길 걷기도 해서 왔는데 재미있었어요. 팬들과 바닷가를 걸었는데 아주 즐거웠어요. 차로 다니는 것하고 전혀 다르죠. 많은 추억들과 만나기도 하고, 많은 분들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좋았어요."

 그가 본 제주의 깊은 매력 속엔 토속적인 제주 신화가 있다. 언젠가 훌륭한 감독이 제주도 신화를 아주 멋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그러면 세계화 되는 거예요. 현대적인 기술을 구사해서 아주 예쁘고 멋있게 만드는 거죠. 그것을 나라가 지원을 한다는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소녀시대 지원 안 해도 되니까 이런데 지원하면 좋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오락도 필요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부분이랄까 우리들과 가까운 부분이 필요하죠.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더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우리 속에 있는 것을."

 # "나의 음악이 누군가, 또 무엇인가에 도움됐으면"

 바람처럼 자유로운 음악가 양방언 그는 어떤 무대건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운명일까. 그가 제주의 아들인 것도. "제약없이. 스스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무대가 있다면 바로 바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싶고. 사실 홍콩이나 북경이나 자유롭게 날았죠. 언제나 우리나라 하늘을 지나면서 상공을 지나가면서 언젠가 여기에 올 수 있을까 이곳에서 활동을 하고 싶다 생각했어요. 신기하죠?" 그가 웃는다. 

 양방언. 피아노가 주지만 하프와 만돌린 등 20여가지 악기를 손수 만지며 여러 민속음악을 버무려내는 이 멈추지 않는 음악가. 그는 음악도 시간이 지나면 자양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가 어떻게 완성되고 어떻게 자라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영상이나 뮤지컬 같은,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수학의 축처럼 인생의 축이 여러 갈래로 뻗어있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다음작은 뭘까. "뮤지컬이예요. 될수록 많은 것으로부터 얻고 싶어요. 그래야 다양한 것이 나올 수 있지요. 중요한 건, 저를 움직이고 있는 것하고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할까. 기다리고 있다기보다는 그것에 관해서는 스스로 나가요. 제작진도 포함해서 음악을 다른 사람들과 할 수 있는 것 정말 좋아요. 유행가요가 안좋다고 하는 것은 아닌데 관심이 없는 이유는 순간순간에 단시간에 음악을 만들고 버리고 그런게 좀 아쉽다고 생각해요."

 그의 말대로 삶이란 그런 것 아닌가. "예측불가능의 삶 속에서 직진하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달려가다 보면 행운의 좌표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경계인으로서의 음악가 양방언. 그는 자신의 음악이 누군가에게, 또 무엇인가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을 희망한다. 통일의 길 위에서 말이다. "혹시 거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을 수 있다면 당연히 할 거고, 기회가 있으면 당연히 할 수 있을 겁니다. 정치 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음악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싶어요.  그것도 하나의 계기라고 생각해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 ysun6418@hanmail.net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