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재일동포 기업가 장윤종

  그 소년의 길은 처음 팍팍한 먼지바람으로 시작되었다. 홀로 열일곱에 건너간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의 삶. 일제강점기, 재일의 삶은 그랬다. 어둔 조국의 터널을 청년들과 함께 파야했던 강제 탄광 징용의 삶, 닥치는대로 해야했던 노동의 삶, 고향바다를 건너 일궈낸 일본 땅에서의 생은 거칠고 막막했으나 희망을 놓아본 적 없다. 끝내는 당당한 재일의 기업가로 서기까지. 지금도 정정한 아흔의 생. 문득 돌아본 기억의 저편은 왜 더 또렷하기만 한가. 한 사람의 일생은 그렇게 녹록한 게 아니다. 그런만큼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가진게 있으면 나눠야한다는 재일동포 기업가 장윤종. 한시도 잊은적 없다. 궁핍하던 고향 가물개(삼양 감수동)를. 잠시 고향을 찾은 그를 만났다. 그의 시대와 삶과 만났다.

 # 감귤 보내기, 고향 마을회관, 제주대 기부 등 실천

   
 
 

 재일동포 기업가 장윤종(張潤鍾)은

 1921년생. 제주시 삼양동 출생. 도쿄 거주. 上野신협 납세저축조합고문. 上野납세저축조합연합회 감사. 장강상사주식회사 대표이사. 도쿄 민단 대동지부 단장, 제주개발협회 이사를 역임함. 삼양에서 서당을 다니다 새로 설립된 삼양소학교를 다녔다. 17세에 도일. 시모노세키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정착했다. 스물세살에 탄광 징용 노동을 하기도 했으며, 1962년엔 감귤을 처음으로 제주도에 기부했다. 돈을 벌면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돈을 벌었다는 그는 마을도로포장 지원, 삼양마을 복지회관을 건립하고, 제주대학교에 3억원을 기부하는 등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국민훈장 목련장, 사회교육문화상, 제주도문화상 해외부문 수상(2003).

 
 
 그가 지어 기부한 삼양동 마을복지회관에서였다. 돈을 벌면 남들처럼 살아보겠다는 정신으로 떠난 일본. 잠시 고향에 와서 살다갈 때도 "일본의 2층에서 일하는 꿈을 꿨다"는 사람. 이젠 너무나 발전해서 실감나지 않는 고향을 본다. 80년대, 삼양바다가 출렁이는 동산에 그가 세운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인 복지회관. 이제 리모델링까지 해서 더 번듯해졌다. 그 모습을 보는 그의 얼굴은 소년처럼 생기에 찼다.

 마을 동사무소 이층도 올려주고 제주대학에도 3억을 기부하는 등 나눔을 실천하는 이 사람. "어릴 때부터 밭에 갔다오다가 여기 쉬는 데가 있었어요. 와서 보니까 남의 동넨 노인복지회관이 있는데 우리동넨 없어서 땅을 사서 집을 지은 거지요." 고향을 떠난 자의 눈 앞에 푸른 고향바다는 언제나 넘실거렸다. 오랜만에 고향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기억은 더 강렬해졌다. 맑은 정신, 그의 기억 또한 밝다.

 "1962년 김영관 지사 시절에 열여섯 사람인가 감귤나무 3년생을 가져왔어. 2년해서 잘 되니까 보내라고 해서. 제주도가 그때 초석이 돼서 부흥하게 되었거든."

 어렵게 살았었기 때문에 더 기부하는 마음이 크다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에게 성공의 길을 물었다. 간단하다. "아무리 어려워도 착실히 일만하면 됩니다. 안그러고 당장만 생각하다가는 잘 안됩니다. 백명에 하나 성공하죠. 말(일본말) 모르고 길 모를 때는 돈을 법니다. 돈을 모아 한국으로 보내서 집사고 밭사고 한 사람은 성공합니다. 근데 말을 알고 길 알고 돈을 펑펑 쓰다보면 실패합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고생없이 이뤄지는게 없지요. 속아서 일생 고생한 사람도 있고. 정신 바싹 차리지 안허민 안돼요."

 # 열일곱에 도일…시모노세키에서 청소일

 태어나니 식민의 땅. 계속 전쟁이었다.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가난한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향은 공출바람이 휭휭 불었고, 삶은 험했다. 양태의 고장 삼양동에서 그 재료인 빗대를 만들어 수입을 얻던 아버지는 맹장염을 앓고 어이없게 세상을 떴다. 그때 그의 나이 열일곱. 일곱 오누이의 장남. 어머니의 무게를 덜어야한다는 마음이 솟았다. 집집마다 일본 친족 한사람씩은 있던 시기. 궁핍한 고향을 떠난 숙부가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어서 도항증명만 보내면 갈 수 있었다. 홀로 부산에서 배를 탔다.

 홀로 도착한 낯선 일본땅, 시모노세키. 여관 청소가 일이었다. "지금은 먼지가 없지만 당시는 도로 공사를 하지 않아서 먼지가 아주 많았어요. 계단까지 청소를 하고 또 했다. 여관에서 살면서 먹고 자고. 아침에 속히 일어나서 청소를 했어요. 손님 들어오면 구두 잘 닦아서 내놓고, 짐 가져다드리면서 20전 30전 인가 모아서 고향에 보내드렸어요. 팁으로만 했지 월급 받아보진 않았어. 저녁엔 손님 들어오니까 꼭 있어야해."

 그 열여덟 열아홉에 일본땅에서 모은 돈은 동생들 공부에 썼다. 증명만하면 일본 드나듦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제주일주하고 가던 최고의 배였던 군대환은 오사카에서 제주에 올 때 한번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 갈 땐 큰 관부연락선을 탔지요."

 # 해방 전 시모노세키에서 오사카로…너트 만들어

 시모노세키에서 오사카로 갔다. 해방 직전, 오사카는 공업지대가 많았다. 당장 일거리부터 찾아야 했다. "이렇게 잘 돌아가게 기름칠해서 나사를 만드니까 그 일을 해봤죠. 베어링 노는 것도 해보고. 졸다가 잘못하면 손가락 끊어지는 사람이 많았어요. 기계가 없어서 수동이었기 때문에 손동작이 빨라야 했지요." 너트 만드는 공장이었다. 수도 파이프 사이를 연결시키는 일을 한 것.

 "흙으로 이 모양을 만들려고 하면 이것 하나 놓고 흙으로 두드려 익혀서 싱을 넣고…일 안해본 사람 일하니까 애 먹는거라. 아주 뜨거운데 대판 공업이란 것은 정말 힘들었어요. 일본 사람도 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했죠."

 그렇게 일본에서 살며 고향을 오가던 스무살시절엔 고향에서도 일을 해야했다. 말구루마(말마차), 번마일까지 했다. "삼양 2동은 농사도 하고 고기도 좀 낚았지만 우리동네 감수동은 모살(모래)만 있어서 힘들었어요. 고기도 좀 낚아봤지만, 마을사람들이 구루마일을 많이 했는데 저도 했지요. 성내까지 공출품을 실어서 말과 같이 갔다 왔다했어요. 화물차가 없어서. 또 동네에 말이 많으니까 번마라고해서 집집마다 말 당번이 되거든. 바쁘면 잘 보는 사람에게 부탁하는거지. 20전 받았어. 말을 데리고 나가 먹이는 일이지."

 고향에서 결혼을 할 때는 스물둘. 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개월 증명제 시기였다. 그의 권유로 나중에 어머니 형제 거의가 일본으로 갔다.

 # 탄광, 그 컴컴한 굴에서의 노동 3개월

 탄광 안은 캄캄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완전 암흑. 약을 넣어서 파보면 돌이 부서지면서 내려온다. 그것을 치워야 했다. 그땐 급히 신호를 해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암석은 부서지는게 없어. 맨 밑에 가면 숨을 못 쉬어 빨리하고 나와야 해. 무연탄 나는덴데. 우리 사람들 큐슈에 많이 갔어요."

 그의 시대를 몰아친 또 하나는 일본에서의 강제 탄광 징용. 태평양 전쟁은 스물셋의 그를 탄광까지 불러들였다. 3개월. 캄캄했던 조국. 어둠의 세월처럼 그 역시 어둠에 갇혀야 했던 시기. "석탄보다 파삭파삭헌 무연탄 있습니다."

 죽어라 일만 했다. 거기서 그는 표창장을 받았단다. "도조 수상 표창장 받고 5원의 금일봉 받았어요. 모두 100명이 가서 3명이 받았어. 하루 집에 와서 있기도 했지만. 꼭 여덟시간 3교대라.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을 했어. 밤에는 졸음이 더와. 굴에 들어갈 땐 밝은데서 들어가면 캄캄해버려. 도라꾸가 다니는데 같이 간 일행 중 한사람은 발 부상을 당해 잘라졌어요. 아파도 일을 해야했어요."

 살다보면 운도 따라야 하는 건가. 해방직전 배를 타고 올 때였다. 배가 팡팡 폭격을 맞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갑판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온 순간이었고, 그는 아슬아슬 살아났다.

 해방은 고향 삼양에서 맞았다. 건준위 시절, 고향을 떠나야했다. 1946년이었고, 오사카 쓰루하시였다. 때문에 4·3은 피할 수 있었다. 그 시기, 일본땅에서 어떻든 기초를 잡으려고 고향에 가지 않았기 때문. "죽을둥 살둥 여러번 겪으면서 살아왔어요. 쓰루하시엔 우리 제주사람들이 점령해서 살고 있었지요. 여기서 돈을 벌 수 있을까 한숨이 나왔지요."

 허나 신발장사도 하면서 돈을 모아 도쿄에서 여관도 샀다. 허나 한 일년 안돼 화재가 나 힘들기도 했다. 다행히 시작한 찻집은 잘 됐다.

 다방, 식당업 등도 하면서 돈을 모았다. "강허지 않으면 속아넘는다. 돈만 벌자. 돈을 벌면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우리의 뿌리, 고향을 잊지 말아야지

 92세. 타고난 건강체일까.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젊어서는 돈 벌려고 하다보니 운동도 못했다는 그는 요즘 일주일에 세번 운동하러 나간다. 음식은 가리지 않지만 소식. 채소를 좋아한다. 고향에 오면 그냥 안온하다. 고향사람들이 다들 좋아하니 좋다.

 "우리의 뿌리니까 고향을 잊지 말아야지. 자식들은 우리말 모르기 때문에 고향 실정을 모르게 됩니다. 일본에서도. 일본사람으로 귀화하는 예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할 수 없죠. 고향에 오고 싶어도 형편이 그렇고, 일본에 살아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인간의 일생. 이만하면 참 거친 길을 참 많이도 걸어왔다. 그 길에는 삶이 곤란하던 시기, 태어나서 아픈 딸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도 깔려있다. 삶의 길은 끊길 줄 알았으나 이어진다.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서 이젠 손손자까지 봤다. 3남2녀 가운데 첫째, 둘째아들이 그의 가업을 잇는다. 셋째아들은 와세다대학교 의대를 나와 의사가 됐다.

 제주도 젊은이들이 대학을 나와서도 일자리 없는 것이 제일 걱정이라는 그에게 성공비결을 물었다. 간단했다. 성실함과 정신력이다.

 "여러 가지 사람의 일생이란 것은 어려운 때가 많은 겁니다. 나도 정신이상까지 갈 뻔했을 정도로 어려운 때가 있었어. 오사카에서. 오늘 가면 해결될 줄 알고 갔다가 되지 않고 하면서 말이지. 사람이 이것저것 경험하는 밑에서 강하게 되는거야." 그렇게 삶의 전부를 치열하게 소진해온 이 노장. 열일곱에 건너던 바다를 바라보는 그 앞에 그의 삶을 위무하듯 파도가 몸을 크게 뒤집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ysun6418@hanmail.net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