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민의 생생한 목소리 무대에서 푼다

 ‘제주 마당극의 살아있는 역사’ ‘4·3을 예술로 형상화하는 작업의 전개’ ‘연희활동을 통한 건전한 대중문화 형성’ ‘신명을 풀어내는 전문 꾼들의 모임’….

 놀이패 한라산(대표 김수열)에는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그만큼 대중과 가까운 자리에서 숨겨진 역사를 들춰내는 힘든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놀이패 한라산의 출발은 우리노래연구회·청년문학회 등과 함께 제주문화운동협의회를 구축,제주 민중문화를 다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데서 찾을 수 있다.이같은 노력은 97년 놀이패 한라산이라는 독립단체로 재출범하면서도 계속됐다.

 놀이패 한라산은 87년 8월 창립 마당극으로 ‘그날 이후’를 공연한 후 같은해 12월에는 노래극 ‘다시는 지지 않으리’로 제주민들을 만났다.

 88년 마당극 ‘항파두리 놀이’부터는 전국민족극한마당대회에 참가하며 제주 마당극의 위치를 알리는 전령역할을 수행했다.

 89년부터 이들의 화두가 된 것은 ‘4·3’.‘4·3’처녀작 ‘4월굿 한라산’공연 이후 90년 ‘백조일손’,91년 ‘헛묘’,92년 ‘꽃놀림’,93년 ‘살짜기 옵서예’,94년 ‘사월’,95년 ‘목마른 신들’,96년 ‘4·3의 기초’,97년 ‘서청별곡’,98년 ‘사팔생오칠졸(四八生五七卒)’에 이르기까지 고집스럽게 ‘4·3’에 매달려왔다.

 4·3의 전과정을 서서적으로 구성,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무대에서부터 드러나지 않은 사건을 중심으로 고발적 색채가 짙은 대사와 피해자·가해자를 떠나 제3자의 시선에서 4·3을 들여다보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4·3’에 대한 도민의 생각을 묶어왔다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98년 정기총회에서 스스로 제기했던 것처럼 10년 넘게 동일한 작품소재로 무대에 오른다는 데서 오는 ‘공연예술 매너리즘’의 경계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백조일손지묘 위령탑 건립 등 제주의 역사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며,4·3에 대한 도민의 피해의식을 최소화 시켜왔다는 긍정적 평가나 최우수 광대상(92년·정공철)·우수작품상(93년·‘살짜기 옵서예’)·최우수작품상(95년·‘목마른 신들’) 등 화려한 경력보다는 제주인의 주체적 사고에 기초,계속되는 ‘4·3’의 무대화로 역사문제 밖에서는 대중들과 함께 호흡할 수 없었다는 반성이 컸다.

그런 반성을 거쳐 ‘도민의 삶과 관련된 여러 가지 소재를 골고루 섭취,역량을 증대시키겠다’는 이들의 의지는 99년 12월 일본인 작가 오다 마코토씨의 작품을 무대화한 ‘아버지를 밟다’를 통해 표출됐다.‘4·3’대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를…’은 제주출신 재일동포 1세대의 삶과 애환,자식들에게 이어지는 고통,돌아온 고향에서의 갈등 등을 통해 제주민이 겪어야 했던 근·현대사의 굴곡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고 이들이이 무대작업에만 힘을 쏟은 것은 아니다.한달에 1번 정기모임을 통해 사업에 대한 논의와 기능훈련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가 하면 ‘마당극교실’ ‘우리문화캠프’ ‘장애인과 함께 하는 문화캠프’등을 운영하며 일반인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순수 마당극이라기 보다는 마당극과 무대극의 혼합 형태를 취하고 있는 놀이패 한라산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평등한 의사소통구조’와 ‘누구나 개입할 수 있는 열린 구조’라는 마당극적 성격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 놀이패 한라산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16명의 회원.이중 현경철·김희정·김영진·고윤정·여상익씨등 다섯명만이 상근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대표인 김수열씨를 비롯 정공철·김경훈·한경임·장윤식·양근혁·이상철·윤현미·윤미란·한송이·부진희시 등이 직업과 연극이라는 두 개의 삶을 꾸리고 있다.

 이들이 새천년을 맞아 희망하는 것은 놀이패 한라산의 문턱을 낮추고 80년대 초에 극장을 매웠던 관객들의 ‘앵콜’소리를 되찾는 것.열린 극단으로의 자생력을 찾고 ,젊은 ‘한라산인’을 키우고,‘관객을 먹고 사는’배우로서의 정체성과 신명성을 찾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다. <고 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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