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수원리 여든아홉 최고령 현역잠수 이정현
경계를 넘어 출가물질 떠나던 식민의 시절. 열일곱 소녀도 선배 잠녀들과 현해탄을 건넜습니다. 물 속 생도 잠깐. 이 바다 저 바다 누비다보니 그 소녀, 어느새 여든아홉. 그런데도 바다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은퇴? 좀 더 기다려라. 아직도 물속 그녀는 젊고 빠르지요. 물고기처럼. 전성기의 그녀처럼. 동료들도 쩍쩍 놀랍니다. 웬걸! 한수리 최고령. 아흔을 코앞에 둔 이 어르신, 점점 중잠녀, 상잠녀 되어간답니다. 그녀 몸은 필경 바다가 만들어주었으리. 바다는 치유의 공간입니다. 물은 아픈 허리도, 다리도 저절로 치유해줍니다. 오락가락 장맛비 속에서도 성게 물질 쉬지 않는 이 바다의 어머니. 70년을 함께 하는 그녀 생의 뜨락에 그가 고무 잠수옷을 벗어 말립니다. 고운태 또렷, 수줍은 듯 환한 미소, 왕년의 잠수왕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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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리 잠수 이정현은 1923년생. 한림읍 한수리가 고향. 최고령 현역 잠수. 열아홉에 한림읍 수원리 김종호씨와 결혼하면서 수원에 산다. 열 살무렵부터 자맥질하기 시작해 일제강점기, 열일곱살부터 일본 오사카 가까운 고지현 등에 출가 물질을 했다. 오사카에서 1년 동안 살면서 공장 일도 하다가 결혼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결혼 후 열아홉살에도 일본 물질을 떠났다가 왔고, 육지 남해안 출가물질도 떠나 몇 달동안 살다오기도 했다. 현재까지 물질 작업을 쉬지 않고 해오고 있는 그녀. 아들 넷, 딸 셋. 슬하에 7남매를 뒀다. 2005년에는 북제주군이 주는 최우수 잠수상을 받았고, 소중기 등 몇가지의 물질 소품을 해녀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물속에만 가면 마음이 편해지고, 운동이 되어 아픈 줄 모른다고 말한다. | ||
사철 겨울물질, 쉬지 않았다. 내년이면 힘들어 못나오시겠지 하던 후배잠수들의 예상은 늘 빗나간다. 아들 딸, 며느리까지 "태왁 없애겠다, 이젠 쉬시라"고 극구 만류하지만 그녀는 바다가 궁금하다. 기어이 바다로 간다. 마른 밭에선 쓰러질 것 같다가도 물에만 들면 아프지 않는다는데 어이 말리랴. "물에 들면 영 분시몰라게. 물속에 가민 운동되어. 물에선 몸이 공중에 뜨기 때문에 아프지 않으난 허는 거주."
3년전까진 먼바다까지 갔던 이 상군잠수. "물 속에선 5년전이나 지금이나 예사닮아. 젊은 아이들도 골골허는디 경 안헤여젼게. " 다만 물건이 가득 차게 작업한 망시리 끌어올리는 일은 옆에서 도와줘서한다고 미안해한다. "요새 허는 성게는 낼 하루만 허민 끝나. 바당이 갇히는 거라."
영원한 현역 잠수 이정현. 그녀의 잠수 비결? "물 아래서도 노력해사주 안허민안돼. 숨도 자주 들고 해야주." 옛날 광목옷 입을때는 한시간만해도 덜덜 떨더니 고무옷 입고부터는 춥지않다. 한번 물에 들면 네시간 이상도 거뜬. 지금 삶은 '대통령 삶'이란다.
# 열일곱살에 일본으로 물질 떠나
열 살 안팎 무렵이다. 자맥질 시작은. 한수리 모살동네 바당. 누구나 농사짓고 물질하던 시절, 바다는 미역, 소라의 저장고였다.
조용하고 일이 야물던 아이는 물질 조금하던 어머니따라 족은눈을 썼다. 금릉리 잠수 인솔자따라 일본물질 지원할 때가 열일곱. "한 삼십명이 갔주. 한림축항에 대었던 군대환 타고 바로 오사카로 갔주. 큰 눈 쓰고 물적삼 해얗게 입언. 맨발에 소중기만 입엉 물질허난 추워. 수건허영 졸라매고. 고무옷 없을땐 광목 모자만도 써 났어. 모자쓰면 물에 들엉 오래 한다고 그것도 못쓰게 했주. 고지현에선 함바집 같은데서 길게 여럿이 잤주. 날 밝으면 가고, 바당 세면 들어오고. 천초 조물면 말리지 않고 일본사람들이 물 있는 채 받아 갔어. 거긴 작지는 넓어도 외바우여서 재미없었어."
나이는 어려도 물질은 뒤처지지 않았다. "물질도 욕심이 있어야 해." 그렇게 일본 물질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였다. 그녀는 거기서 번 일본돈 10만원 인솔자에 주고 홀로 오사카에 떨어졌다. 남아서 돈을 벌고 싶어서였다. 오사카. 종이 봉투 만들고 판 찍어서 만드는 일을 일년 정도했을 때다.
고향에선 귀향해 시집가라 재촉이었다. 열아홉에 이웃마을로 가마타고 갔다. 얼굴한번 본 적없는 남편 역시 열두살에 일본 가서 살다 같은 이유로 열아홉에 귀향한 스물한살 청년. 시아버지는 독배로 고기잡고 있었다.
갓 결혼하고 다시 일본 물질행. 이번엔 인솔자 남편과 여럿이 갔다. 3월경 가서 유월경 돌아오는 동안 서너군데 살면서 물질했다. "고말목엔 물건이 없어. 시모노세키에 간. 그저 차비만 벌언 오란. 거긴 터진데가 어선. 여기 바당 같지 않아. 천초도 조금 있었주."
남해안 물질도 갔다왔지만 스물하나에 첫 아들 낳곤 수원바다에서만 물질했다는 그녀. 어딘들 고향 작지 너른 바다만한 곳 있었을까. "여긴 바당이 넓어. 천초(우뭇가사리)가 좋아. 먼바당에선 생복 허는 사람은 태왁 심엉 한사람 심어주고 서로 심어주멍 해서. "
# 일제 강점기, 일본군인들 출입하던 앞마당
초록 잔디가 사각형으로 깔린 그녀의 마당은 역사의 마당이다. 마당 앞 밖거리를 짓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일본군인들 왔다갔다 했다. 아직도 눈에 가물거린다.
"이 마당, 여기 몽땅 밭이었주. 이 밭에 일본군인들이 천막 두 개 치고 살안. 이 마당으로 왔다갔다 출입허엿수다. 밭에다 눌 일던 감자 구덩이 같은 것 여기저기 호갱이 파서 거기 군인들 한사람씩 앉앙 총도 숨겨두곡 해낫주. 밥도 이시민 갔다주곡. 일본 사람들 해방되언 손 들런 갈땐 막 울멍 갔어. 고맙다고 허는 사람도 있고. 마당 우영팟 보리낭 눌 위에 군인들 보초 서고."
그 시기, 바다엔 고기들이 하얗게 떠 있었다. 일본군이 남은 탄약들을 바다에 던지고 갈 때였다. "곧 폭발시켜 가버리면 고등어영 고기들 한망사리씩 조물아당 팔아나서. 막 기절헌 고기들이 허얗게 둥둥 떠 있는거라. 대림에 강 팥도 바꾸고, 콩에도 바꾸고. 울림만 헌거난 놀라서 오래 있으면 달아나부런."
해방전, 비양도 앞에 배 두척이 침몰당하던 것도 기억한다. "미국서 밤에 오꼿 군인들 실은 배 폭발시켜부런. 지금은 축항에 배가 잔뜩인데 그땐 그리 많지 않았주. 군인들 시신들 떠 있었주."
일제강점기. 누구나 어렵던 시절. 조, 보리 밭농사에 바다농사까지 쉬지 않았으나 배고팠다. 공출은 또 어땠는가. "비료도 없고 해서 농사 지은것 바치라하면 먹을 것 없어도 바쳐야허연, 우린 점심땐 양식을 조금만 먹고. 고구마해서 겨우 먹고 살앗주."
# 4·3, 밭에 굴 파서 숨어 살던 시절
남편은 자꾸 배만 탔다. 해방공간. 4·3을 피하기 위해 바다로만 다녔다. 죽을 위기도 겪어야했다. 큰아들, 큰딸 낳았을 때였다.
"서청이 마을 남자들 산에 다닌다고 다 도갯집(현 수원복지회관)에 일렬로 세완. 총으로 쏘젠 헐때 서쪽으로 빙 차소리가 난. 군인들이 완 제주시에서 급한 일이 있으니 서청들 빨리 나오라고 허연 살았젠." 정말 운이 좋았다.
칠십여년 조용조용 해로하다가 지난해 먼저 세상 뜬 남편은 동네서 '죄는 할아버지'로 통한다. 훤칠하게 생긴 신랑은 일본에서 권투하면서 배웠던 솜씨로 팔이 아픈 사람들을 잘 죄어줘 서귀포시까지 소문나던 사람. "일본에 기술 배우러 가서 권투배운 사람한테 두드려 맞으난 권투 배우고렌. 그때 팔 죄는 걸 잘허연."
일제강점기 때도 조마조마했고, 해방되자 4·3광풍땐 저녁이 되면 온가족이 진동산이나 굴속에 가서 누웠다왔다. "밭에 굴을 파서 아이들 업언 가서 숨었다 왔주. 힘든 세상이라낫주." 우여곡절. 마을엔 같은 날 제사가 많다. 함께 나갔다가 풍랑 만나 다른 배들이 침몰하는데 시아버지 배만 살아오기도 했다.
# 바다는 생업의 공간이자 치유의 공간
그의 교통수단은 자전거. 수원 잠수들 대부분 자전거 선수들. 그녀 역시 세 개째 자전거를 바꿨다. 한림 오일장이고 어디고 타고 다닌다.
그에게 바당은 업이다. 애기 서넛 낳고 살림살던 시절, 소살로 고기 쏘는 것은 선수였다. 비양도까지 배 타고 가서 쏘았다. "시아버지네 배에 잠수들 타고 갔주. 고기를 한망사리 쏘안 놀랐주. 사람들이 들엉 비우난 질구덕으로 고기가 한가득이라난. 젊을땐 정말 빨란. 대여섯발씩 헤엄쳤주."
큰 가오리를 쏘았을 때였다. 소살 찬 채 도망가니 태왁도 안 심고 헤엄쳐 잡으러 가서 잡았던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못할 짓 했구나도 생각해. 이젠 그물로 다 잡아부난 고기가 없어. 바당도 오염되고. 너무 잡아부난. 전복도 없어. 옛날엔 지금처럼 사는 사람도 별로 없어."
지금처럼 자전거도 없던 젊은시절, 잠녀들이 물건을 구덕에 등짐지고 한림 가 팔았다는 그녀. 북바리 돌돔 들이 인기 품목. "웽이는 어디 돌아다니는거난 돌 일어가민 나와. 이젠 우럭도 못 쏘안. 피질락 허멍. 아이고 옛날 많이 쏘아부난. 쏘지도 않아."
생의 전부가 바당인 삶. 바다에 갔었으니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바다가 있어 고맙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주. 부지런한 공으로 밭도 서너개 사고. 자식 일곱 키우멍 어떵사 살아져신지."
밭일, 바닷일 하며 지내온 생. 돌아보니 참 고맙다. 건강하게 커준 자식들이 고맙고 바다가 고맙다. "장난도 허지 말고 놈의 것도 먹지 말고 때리지도 말고 허랜허민 싸우지도 안허고 커주난 고맙주게." 2005년 최우수 잠녀상 받았을때도 그랬다. 그저 기분이 좋았지만 분수몰라서 받았단다.
바다에 몸을 섞는 동안 그의 몸은 자유다. "저 삼촌은 백나도록 허염직하다고 사람들이 해. 중잠녀 넘엄져. 대잠녀 되엄수다. 점점 자꾸 더 잘허염댄. 오늘 바람 세어도 1㎏300인가 많이 헤저선게."
그녀, 유년의 뜰은 바다였다. 신혼의 뜰도 바다였다. 황혼의 뜰도 바다다. 옥수수 자울자울 익어가는 좁은 올레 길 들어서면 열아홉에 꽃가마 타고 왔다는 그 새색시의 문전이다. 마당에서 고개를 돌리기만하면 풍경처럼 비양도가 걸린다. 생과 사의 바다가 보인다. 그 마당에 검은 잠수옷, 태왁이 걸려있다. 영원한 전문직 현역잠수, 그녀가 홀로 사는 집. 우기속 우영팟 호박넝쿨은 늙은 돌담을 기어이 오르고 있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