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66> 4·3수형자 심사 ①

   
 
  2001년 12월21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4·3유족회 주최로 조속한 희생자 심사와 4·3평화공원 조성 기본계획 심의를 촉구하는 유족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보수측 "헌재가 제시한 기준보다 강화해야"
구체적 증거있는 수괴급 등 제외키로 결정

4·3수형자 심사 ①
제주4·3특별법에 정의된 '희생자'의 범위는 "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후유장애가 남아 있는 자로서 4·3위원회에서 심의·결정된 자"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희생자 심의·결정 기준은 명시돼 있지 않다. 따라서 희생자 심사를 어떤 기본원칙으로 할 것인지, 희생자 범위에서 제외될 대상은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구체적인 심의·결정 방법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국무총리 소속의 제주4·3위원회는 2001년 10월11일 희생자심사소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제주도지사 소속의 실무위원회에서 올라온 희생자별 심사자료를 위원회에 상정하기 전 집중 검토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심사소위원회 위원장에는 박재승 변호사, 위원으로는 김삼웅(대한매일 주필), 박창욱(4·3민간인유족회장),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황우(동국대 경찰학과 교수), 임문철(제주서문성당 주임신부), 한광덕(전 국방대학원장) 위원이 위촉됐다. 학계·언론계·종교계·유족 대표뿐만 아니라 군·경 쪽 인사도 참여한 구조였다.

이 심사소위에 닥친 첫 과제가 바로 심사기준을 정하는 일이었다. 막상 심사기준을 만들려고 하니, 가장 예민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 '희생자 제외대상 범위'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심사소위 위원들을 곤혹스럽게 한 것이 있었다. 바로 헌법재판소가 예시한 '희생자 명예회복 제외기준'이었다.

헌재는 2001년 9월27일 성우회 등이 제기한 4·3특별법의 위헌심판 청구를 각하 결정하면서, 이례적으로 희생자 명예회복 제외대상자를 예시한 것이다. 즉, 1)수괴급 무장병력 지휘관 및 중간간부 2)남로당 제주도당 핵심간부 3)주도적·적극적으로 살인·방화에 가담한 자를 꼽았다.

심사소위 내에서는 이 헌재 기준보다 더 강화된 안을 만들자는 의견과 이에 개의치 말고 희생자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자는 의견이 맞섰다. 사실, 헌재의 기준안은 단지 의견 표명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무시했다가는 보수단체에서 다시 위헌소송 제기 등 위원회 활동을 방해할 개연성은 얼마든지 예견됐다.

보수단체에서는 2001년 12월12일 "무장폭도가 희생자로 둔갑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희생자 심사기준 강화를 촉구했다. 덩달아 4·3평화공원 조성 기본계획 심의도 미뤄지자, 이에 자극을 받은 4·3유족회는 12월21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제주4·3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유족 총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이런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한 심사기준 초안이 서중석 교수에 의해 제시됐다. 이 안은 논란 끝에 심사소위를 통과한 뒤, 2002년 3월14일 이한동 국무총리가 주재한 제4차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결됐다. 이 심사기준 중 논란이 됐던 '희생자 제외대상'은 1)제주4·3사건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2)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으로 정하되, "이 경우 그러한 행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 안이 확정되자 양쪽 모두 반발했다. 유족회를 비롯한 4·3 관련단체들은 명예회복 대상자를 축소하는 기준이 화해와 상생이란 특별법의 취지를 퇴색시켰다며 비판했다. 그런 가운데 4·3유족회는 3월18일 기자회견을 갖고, 희생자 선정기준에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백지화 또는 재심의 요구보다는 "희생자 심사 과정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 철저한 감시활동을 벌여 나가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보수단체의 불만은 「조선일보」가 적극 대변하고 나섰다. 이 신문은 3월15일자 1면에 "군경 살해·방화범도 명예회복 포함 논란", 5면에 "헌재 판정기준도 제대로 수용 안해"란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다음날인 16일자에는 4·3위원회 당연직 정부위원 8명(장관급)에게 '군경 살해범 명예회복'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 "정부위원들 입장 제각각"이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8일자에는 사설로 이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었다.

4·3희생자 심사는 이런 격랑을 타면서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2002년 11월20일 김석수 국무총리가 주재한 제5차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희생자 1715명이 처음으로 결정됐다. 그리고 2003년에 3329명, 2004년에 1246명이 4·3희생자로 각각 결정됐다.

그런데 2004년에 이르러 희생자 심사가 더디게 진행됐다. 민감한 수형자 심사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유보됐던 수형자에 대한 심사가 재개되자 "유죄판결을 받은 수형자들은 4·3희생자로 결정돼서는 절대 안된다"는 보수단체의 성명이 잇따랐다.

그때까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에 진력했던 필자와 김종민 전문위원은 보고서 작성 업무가 종료되자 이 무렵부터 희생자 심사업무에 관여하게 됐다. 그리고 처음 부닥친 난제가 바로 수형자 심사였다.

☞다음회는 '4·3수형자 심사'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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