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67> 4·3수형자 심사 ②

   
 
  1948년 11월 제주농업학교에 수용된 사람들. 그들에겐 제대로 된 재판 절차 없이 무거운 형량이 매겨졌다. 사진은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찾아냈다.  
 

"정상적 재판 아니다" 보고서 확정 후 탄력
 판결문 없다며 석방된 김춘배 사례로 입증

4·3수형자 심사 ②
제주4·3사건 희생자 심사 과정에서 '수형자'도 그 대상에 포함하느냐 마느냐는 논쟁은 2002년부터 시작됐다. 그때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수형자들을 4·3 희생자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보수단체의 주장과, 4·3 재판 자체가 엉터리였고, 또한 전국 형무소에 수감됐던 수형자 대부분이 6·25직후 불법적으로 처형되거나 행방불명됐기 때문에 당연히 희생자로 결정돼야 한다는 4·3 관련단체의 주장이 첨예하게 맞섰다.

4·3위원회에 희생자로 신고된 수형자는 일반재판과 군법회의 해당자로 구분됐다. 일반재판 해당자는 400여명으로 형량이 낮은 반면, 군법회의 해당자는 그 숫자도 2000명 가까이 되고 형량도 매우 무거웠다. 자연히 진상조사도 군법회의의 진위와 적법성 여부에 초점이 맞춰졌다.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이 분야의 집필을 맡은 박찬식 전문위원은 정부기록보존소 등에 몇 달씩 체류하며 자료 발굴에 매진했다. 또한 희생자 심사 전담 전문위원으로 채용된 조임영 법학박사는 군법회의 재판의 법적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이런 조사를 거쳐 1948년과 1949년 제주도에서 이뤄진 군법회의가 정상적인 재판이 아님을 밝혀냈다.

그 이유로는 1)판결문 등 소송기록이 애초부터 작성되지 않은 점 2)불과 며칠 사이에 수많은 인원을 대상으로 소송절차를 진행하고 판결한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 3)수형자들이 제주도를 떠나 전국 형무소에 이송된 후에야 비로소 형량이 통보되었다는 점 4)불과 사흘만에 345명을 사형 선고했다면 사법사상 최대의 사건인데도 국내·외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은 점 5)그 시신들을 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암매장한 점 등이 꼽혔다.

희생자심사소위원회는 2002년 10월25일 이런 전문위원들의 조사 결과를 보고 받았다. 그럼에도 군경측 한광덕·이황우 위원은 이를 승복할 수 없다며 버티었다. 몇차례 회의를 거듭했지만 논란만 증폭되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4·3유족회는 분노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가 후유장애자로 신고된 수형자들부터 먼저 심사하자는 절충안이 받아들여졌다. 현재 생존해 있는 후유장애자들이 언제 사망할지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희생자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시급성이 반영된 것이다. 희생자심사소위는 이런 과정을 거쳐 2003년 4월10일 후유장애자로 신고된 수형자 16명을 희생자로 인정하는 안을 확정했다.

그러나 그해 10월15일 제8차 4·3위원회 전체회의에 처음으로 상정된 수형자 16명에 대한 희생자 결정은 보류되고 말았다. 이날 회의에서 수형자의 희생자 결정문제가 계속 논란을 빚자 고건 국무총리는 "한 번 더 심의를 해서 처리하자"고 유보 결정을 한 것이다. 고 총리는 이날 함께 상정된 진상조사보고서 최종 통과가 급선무라고 판단한 듯 했다.

희생자심사소위에서 수형자문제가 재론된 것은 2004년 3월26일 제30차 심사소위 회의 때부터이었다. 그 사이 여러 변화가 있었다. 일단 최종 통과한 진상조사보고서에선 4·3 군법회의를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재판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으로 진상보고서 통과에 반발한 군경 측 강경파 한광덕·이황우 위원이 사퇴함에 따라 그 후임으로 한용원(예비역 대령·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배찬복(명지대 교수) 위원이 위촉됐는데, 비교적 온건한 성향이었다. 또한 박찬식·조임영 전문위원의 사임으로 수형자 심사업무를 필자와 김종민 전문위원이 맡게 된 것이다.

제30차 희생자심사소위에서 김종민 전문위원이 '수형자 관련 검토사항'을 보고했다. 새롭게 밝혀진 미군자료, 국내 수형자료, 수형자 김춘배·박상우 사례, 허지홍 대위 군법회의 사례 등이 보고됐다. 한마디로 4·3 군법회의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자료들이었다. 

특히 20년형을 선고받았다는 김춘배 사례가 주목을 끌었다. 그는 재판을 받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던 그는 6·25직후 옥문이 열리면서 출소했다. 그러다가 재수감된 것인데, 이에 억울하다고 이의신청을 했더니 1963년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판결문 등 증명자료가 없음을 확인하고 풀어줬다는 것이다.

이날 회의 이후 수형자 심사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희생자심사소위는 형량이 가벼운 수형자들부터 본격적으로 심사해 2005년 3월17일 열린 제10차 4·3위원회 전체회의에 수형자 606명을 상정했다. 그러나 전체회의를 앞두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보수단체의 반대 성명이 발표됐고, 법무·국방장관도 반대대열에 선다는 정보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다음회는 '4·3수형자 심사' 제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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