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74> 4·3희생자 유해 발굴 ①

   
 
  2007년 11월 제주국제공항 영내에서 4·3유해가 발굴되자 유족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갖고 있다. 마이크를 잡은 이는 고고학 팀장인 박근태 연구원.  
 

2006년 국비 지원되면서 발굴사업 탄력
집단 암매장추정 제주공항 발굴에 이목

4·3희생자 유해 발굴 ①
4·3희생자 유해 발굴사업은 반세기 넘게 풀지 못한 숙제였다. 4·3 당시 희생자 중에는 '시신 없는 희생자들'이 많다. 그 숫자가 무려 4000~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의해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끌려갔다가 6·25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집단 처형돼 묻힌 장소조차 모르는가하면, 제주도내 곳곳에 암매장된 사례도 있다.

그 중 일부는 유족들의 노력에 의해 유해를 수습하고 안장된 일이 있다. 1956년 6년만에 132구의 시신을 거두었지만 뒤엉켜진 유골을 일일이 구분할 수 없어서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란 뜻의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란 이름의 묘역(안덕면 사계리 소재)이 만들어진 것이 대표적 사례다.

남원읍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매장된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4·3사건 당시 시신이 구별되지 않은 채 커다란 3개의 봉분에 나뉘어 매장됐던 현의합장묘의 유해는 2003년 의귀리에서 수망리로 이장됐는데, 이장 당시 39구의 유해가 확인됐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1992년 발굴된 '다랑쉬굴 유해' 11구는 "양지바른 곳에 안장해야 한다"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발굴 45일만에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해 바다에 뿌려졌다.

필자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4·3유해 발굴사업은 국가사업으로 추진하는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2003년 4·3진상조사보고서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대정부 7대 건의사항 초안을 쓸 때, '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 지원'을 6번째 항목에 삽입하면서, 다른 건의사항보다 길게 썼던 기억이 난다. 즉, "정부는 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을 지원해야 하며, 유해 발굴 절차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존엄성과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을 충분히 존중해 시행해야 한다"고 표현한 것인데, 그대로 채택됐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제주도는 2005년 제주4·3연구소에 의뢰해 '제주4·3유적 종합정비 및 유해 발굴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당면한 문제는 유해 발굴에 따른 국비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 물꼬를 강창일 국회의원과 이해찬 국무총리가 텄다.

2005년 4·3희생자 위령제에 이 총리가 참석하자 강 의원이 "제주도내 도처에 4·3유해들이 산재해 있는데,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있느냐"면서 국비 지원을 촉구했다. 이 총리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쐐기 박듯 김두연 4·3유족회장이 오찬행사장에서 큰 목소리로 "유해 발굴비 지원을 약속하신 총리님 고맙습니다"고 인사한 뒤 참석자들의 박수를 유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6년 정부 예산에 4·3희생자 유해 발굴 예산 10억원이 처음으로 반영됐다. 2006년 4·3희생자 위령제에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도 "유해와 유적지를 발굴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밝혀 힘을 보탰다.

이렇게 4·3희생자 유해 발굴계획이 하나하나 추진되던 2006년 5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제주시 화북동 하천 정비 공사장에서 4·3사건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 3구가 발견됐다. 제주4·3연구소가 나서서 긴급구제 발굴을 했는데, 비록 발굴된 유해가 3구에 불과하긴 했지만 이는 유해 발굴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2006년 10월 제주도는 제주대학교(연구책임자 강현욱)와 제주4·3연구소(책임연구자 유철인)와의 위탁협약을 체결해 화북동 일대 5개 지역을 대상으로 유해 발굴사업을 추진했다. 이 사업은 유해 발굴만이 아니라 유해의 신원 확인, 법의학적 감식, 인류학적 분석 등을 수행하도록 했다.  

화북지역 유해 발굴조사를 통해 그동안 땅속에 갇혔던 11구의 유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별도봉 일본군 진지동굴 안에서는 8구의 유해와 유류품 188점이 발견됐다. DNA 감식을 통해 유해 2구의 신원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동안 풍문처럼 떠돌던 암매장 현장이 속속 드러나면서 이제 이목은 제주국제공항으로 쏠렸다.

4·3 진상규명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예전 '정뜨르 비행장'으로 불렀던 제주국제공항에 많은 시신들이 암매장됐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려왔다. 실제로 그 현장을 목격했다는 증언자들도 있었다. 주로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의한 학살과 6·25전쟁 직후 예비검속에 의한 집단 학살 피해자들이었다. 당시 비행장 안에는 커다란 구덩이들이 있어서 수백명씩 암매장하는데 용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항이 어떤 시설인가. A급 국가보안시설로 공항 주변에서 사진 한 장이라도 잘못 찍었다간 혼쭐나던 시절도 있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이라면 언감생심 어찌 그런 곳에 들어가서 유해를 발굴하겠다고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그런데 세상은 변해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도왔다. 저가 소형항공기의 출현으로 그동안 쓰지 않던 남북활주로를 활용하게 되면서 주변 부지에 대한 정비가 필요했다. 4·3희생자 유해들은 바로 그 남북 활주로 주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됐다. 그 틈새를 비비고 들어가 발굴허가를 받은 것이다. 결국 382구의 유해가 쏟아져 나온 공항 유해 발굴은 2007년 8월부터 시작됐다.    

☞다음회는 '4·3희생자 유해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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