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75> 4·3희생자 유해 발굴 ②

   
 
  2008년 2차 발굴 때 제주국제공항 남북 활주로 옆에서 200여구가 뒤엉켜진 채 발견된 유해들. 발굴팀이 압착된 유해들을 하나씩 가려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제주공항 영내 60년간 방치된 채로 압착
옛지적도 발굴 길잡이…문명사회에 "충격"

4·3희생자 유해 발굴 ②

   
 
  제주국제공항 4·3유해 발굴 현장   
 

2007년 8월부터 본격 추진된 제주국제공항 내 4·3희생자 유해 발굴사업은 제주도로부터 위탁받은 제주대학교(책임연구자 강현욱)와 제주4·3연구소(책임연구자 박찬식) 발굴팀이 공동으로 추진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국가 최고급 보안시설인 국제공항 안에서 과거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유해들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첫째는 권위주의정권이 민주정권으로 바뀐 것을 우선 꼽을 수 있다. 둘째는 국가원수가 2006년 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서 유해 발굴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공표한 점이다. 셋째는 2006년 12월 국회가 '4·3 수형자'를 희생자 범위에 포함하는 법 개정을 한 점이다. 넷째는 2007년 3월 국무총리가 주재한 정부위원회에서 제주공항 안에 암매장된 군법회의 사형수들까지 4·3희생자로 결정한 점이다.  

이런 변화가 있었기에 평소 까다롭다는 공항당국도 유해 발굴 허가에 유연하게 접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항 내 유해 발굴은 1, 2차로 실시됐다. 1차는 남북 활주로 북서쪽 지점에서 2007년 8월부터 그해 말까지 진행돼 유해 123구를 찾아냈다. 2차는 남북 활주로 북동쪽 지점에서 2008년 9월부터 2009년 6월까지 모두 259구의 유해를 발굴한 것이다.

1차 발굴지점은 6·25전쟁 직후인 1950년 8월 예비검속된 사람들이 암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던 곳이다. 4·3연구소 발굴팀은 문헌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해서 암매장지 위치를 추적했다. 공항 경내가 넓었기 때문에 장소를 특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졌지만, 유해 매몰 지점을 지목한 옛날 지적도가 길잡이 역할을 했다. 이 구지적도는 공항 확장 이전의 것으로, 발굴팀이 4·3중앙위원회 김종민 전문위원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김 위원은 미국에서 한국 과거사 진상규명에 혼신의 열정을 쏟다가 얼마전 타계한 이도영 박사로부터 이 구지적도를 건네받았다. 이 지적도 위에는 이 박사가 조사한 유해 매몰 예상 지점을 형광펜으로 표시까지 됐었는데, 초기 위치를 찾는데 단초를 제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해 발굴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다. 첫째는 공항 확장공사를 하면서 과거의 구덩이를 매립했기 때문에 원래의 땅을 찾아내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원래 지형보다 3~5m 가량 높게 매립되어 있어서 넓은 면적의 매립토를 걷어내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얼마 후 파편처럼 흩어진 뼈 조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항 확장공사에 휘말려 부서진 유해들이었다.

드디어 거대한 암매장 구덩이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정밀 발굴한 결과 그 구덩이는 폭 1.5m, 길이 32m에 이르렀다. 그 구덩이를 중심으로 유해 123구와 유류품 659점을 수습했다. 유류품은 카빈 소총 및 M1 소총 탄피, 안경, 금보철, 의안, 단추, 머리빗, 신발 등이었다. 특히 실명이 새겨진 도장 2점이 발굴됐는데, 희생자 명부와 대조한 결과 신원이 확인됐다.

발굴 팀에게 두 번째 시련은 폭우였다. 그해 가을엔 유독 비가 많이 왔다. 9월 중순 제주를 삼킨 A급 태풍 '나리' 때는 하마터면 연구원들이 큰 변을 당할 뻔 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쉬는 날이었는데, 폭우가 쏟아지자 발굴현장의 훼손을 염려한 조미영·고성만·박근태 등 3명의 연구원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시간당 100㎜가 쏟아지는 폭우로 고립되고 말았다. 해안도로 범람으로 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겨우 넘겨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2차 발굴은 남북 활주로 북동쪽 지역에서 2008년 9월부터 시행됐다. 1949년 10월 사형수 249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던 곳이었다. 4·3중앙위원회는 이미 이들이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됐다고 규정하고, 4·3희생자로 결정한 바 있다. 이곳에서 뒤엉켜 처형된 유해 259구와 유류품 1311점을 찾아냈다.

2차 발굴 때 현장 발굴을 지휘하던 고고학자가 그 무렵 250구의 유해를 안고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발굴된 유해수와 거의 일치해서 4·3영령들이 작용하고 있는가하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리 넓지 않은 구덩이에 200여 구의 시신이 압착된 상태로 여러 층에 겹쳐 있어서 발굴자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남북 활주로와의 거리는 72m. 활주로 옆 70m 이내의 발굴은 금지되어 있어서 하마터면 세상 빛을 보지 못할 뻔했던 유해들이었다. 문명사회에서 이런 유해들이 60년 동안 방치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회는 '4·3희생자 유해 발굴' 제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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