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5부 '잠녀'에서 미래를 읽다-가파도 잠녀 2

▲ 가파도 잠녀가 물질하는 모습. 류상수 감독 제공
수탈의 역사 온 몸에 안은 섬, '케파트(Quepart)' 등 세상 일찍 품어
'큰 잠녀' 김병화 할머니 등 물질의존도 여전히 높아, 민속지식 풍부

지난해 이맘 때 섬은 잠녀 한 명을 잃었다. 매년 하나 둘씩 바다를 떠나는 것도 모자라 바다에서 잃는다. 그런 섬을 바람 따라 청보리 밭의 관능적인 군무(群舞)가 일렁이는 사이 구불구불 난 올레길과 모 예능프로그램에 소개된 이후 사람들의 눈과 입을 혼미하게 하는 소박하지만 싱싱하고 넉넉한 해산물 밥상 정도로만 기억할 수는 없다. 섬의 시간은 훨씬 오래고 깊다. 그 바다를 일구며 삶을 엮었던 잠녀의 숨비소리가 그러하듯이.

▲ 김병화 할머니
▲ 해녀 마스크
# 공동어장 개념 시발점 '가파도 사건'

'탄소제로'를 앞세운 친환경 생활문화의 축소판까지 가파도를 지칭하는 말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가파도는 그보다 일찍 세상과 가슴을 맞췄다.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이 제주 부근에서 표류돼 조선에서 14년을 생활하다 귀국 후 발표한 「하멜표류기」에 등장하는 '케파트(Quepart)'라는 설도 그중 하나다. 가파도의 옛 이름 '개파도(蓋波島)'를 그들식으로 표기했다는 주장이다. 개파도 외에 개도(蓋島), 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 더우섬, 더푸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가파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1750년(영조 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주 목사가 조정에 진상하기 위하여 소 50마리를 방목하면서 소들을 지키려 40여 가구 주민들의 입도를 허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파도가 여행자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최근 들어서이다. 

하지만 보다 꼼꼼히 제주 관련 자료를 뒤지다 보면 가파도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그 흔적은 반갑다기보다 오랜 상처처럼 어딘가 불편하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왕조에 이르기까지 제주 섬에서 진상을 한 품목은 제주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매달려야 조달 가능할 정도로 가지수나 물량이 만만치 않았다. 전복과 소라, 진주, 귤 등 세물(稅物)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수탈이 이뤄졌다. 외부로부터의 시달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세기말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일본 잠수기선의 횡포가 극에 달할 때 이른바 '가파도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은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것을 기화로 제주 연근해에서 막대한 어업상의 이익을 독점하려 했고, 1883년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된 후에는 노골적으로 일본의 잠수기선들이 제주 바다에 들어와 조업을 하면서 제주 섬에 상륙해 돼지 등 가축까지 노략질을 일삼았다.

가파도 사건은 일본 잠수기선의 횡포에 항의하던 주민이 살해되는 사건으로 당시 주인 없는 바다어장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를 기화로 주민들의 건의가 빗발치면서 대한제국과 일본간 회담 필요성이 대두, 제주 해협에서의 통상 어로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이어 1900년께 제주 전역에 대한 측량과 식생 조사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제주 연안에 대한 수심 측량조사가 이뤄졌고 도민들은 일본의 약탈을 저지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멸치망과 미역 채취 등을 공동어로작업으로 한 뒤 분배하는 방법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공동어장'의 시작점이 가파도였던 셈이다.

▲ 할망당
# 반 세기 노 잠녀와 섬의 일체감

제주 잠녀들 사이에서도 섬 출신 잠녀들에 대한 평가는 후하다. 간혹 지나칠 정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섬에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다 섬 특유의 바다 사정이 잠녀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파도도 그렇다. 가파도 주변에는 '블루코너'라는 독특한 해저지형이 형성돼 있다. 블루코너란 수심 10m 정도로 평탄하게 뻗어나가다가 갑자기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 해저를 말한다. 여기는 조류 흐름이 빨라서 여지간한 실력이 아니고는 감히 물질을 나서지 않는다. 한류와 난류까지 교차하면서 비교적 어종도 풍부하고 밭 사정이 좋은 편이다.

가파도 왕언니 김병화 할머니(70)는 그렇게 55년 넘게 바다와 살고 있다. 비슷한 연배의 잠녀들이 이제 '덕(곳)'에서 물질을 하지만 김 할머니는 여전히 뱃물질을 한다. 김 할머니는 "그냥 벗을 해주는 정도"라고 말했지만 '존(아래아)잠녀'는 아예 물질을 하지 못하는 '허성장골'까지 살필 만큼 물눈이 밝은 큰(상군) 잠녀다.

동바당에서 서바당으로 상동을 지나 하동까지 바다 이름이 줄줄이다. "동바당에는 넙개에 넙개우치, 서우여, 물섬, 독개알여가 있지. 양식장은 암여라고 불러. 동쪽 물 아피가 좌세기고 들물, 창들이, 상동에는 두개머리…"

2시간여면 걸어서도 한 바퀴 돌 수 있을 만큼 작은 섬이지만 할머니가 그린 바다는 생각보다 크고 넓다. 상군들만 작업을 한다고 해서 '청와대'라는 별칭이 붙은 허성장골은 전복이 많이 난다고 일러주신다. 알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지만 한길 이상 바다 속을 가보지도 않고는 알 리 없다. 마냥 알겠다 말하는 모양새를 그냥 예쁘다 해주는 마음을 챙길 뿐이다.

김 할머니의 기억은 그대로 가파도였다. 추위 등으로 물질을 어려운 동안 바깥물질도 나갔었다. 일본에도 잠깐 나갔었고 통영 물질에서는 '제주도에 가지마라'는 사람들의 만류까지 뿌리치며 다시 섬으로 왔다.
잠녀가 많다 보니 일도 많았다. 김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제주에 고무잠수옷이 가장 늦게 보급된 지역이 다름아닌 가파도다. 심지어 마라도 잠녀들도 입고 작업을 하는 동안 내부 싸움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때가 줄잡아 1980년대 초입이다.

김 할머니는 "고무옷을 입으면 소라며 다 씨가 마른다고 반대하는 잠녀들과 그래도 입고 작업해야 겠다는 잠녀들이 한참을 다퉜다"며 "막상 입게 된 후에도 하의와 오리발을 쓰지 못하게 해서 상의만 입고 작업했다"고 기억했다.

김 할머니가 25~26살 이던 무렵까지는 마라도와 가파도를 서로 오가며 물질을 하기도 했다. 최근 태풍까지 보태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진 작은 불턱이 여럿이나 있었던 까닭도 귀띔했다. "바위틈에 앉아도 5명 정도밖에 앉지 못하고 바람 방향 따라 물질하는 바다가 바뀌다 보니 하나 둘 생겨났다"며 "좁아서 눈치만 보는 어린 잠녀들을 큰 잠녀가 데려다 앉히기도 하고 헌옷 두세개를 붙여 만든 물체를 둘러써서 추위를 막곤 했다"고 말했다.

섬에서 땔감은 언감생심이라 초가 새기나 감태가 올라오면 말렸다가 불을 때는데 썼다. 화력이 약하기는 했지만 좁쌀구쟁기(잔 소라)며 물꾸럭(문어) 등을 구워 나눠 먹었다. 마을 안 다툼도 불턱 안에서 해결했다. 그 때는 그랬다.

김 할머니는 '기리 물질'을 했던 기억도 떠올렸다. 잠수복을 입지 않을 때 몸에 줄을 묶고 깊은 바다에서 하는 작업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했다. 10㎏가 넘는 돌을 매고 아버지가 잡아주는 줄에 의지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일본에서 하는 방식을 누군가 알려줘 시작한 작업은 생각보다 많은 해산물을 줬다. 하지만 3일 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가파도 잠녀들이 단체로 하지 못하게 막아섰기 때문이다.

해경을 앞두고 절에 갈 채비도 마쳤지만 음력 정월이면 상동 할망당을 살핀다. 요왕과 할망 몫 외에도 바다에서 돌아가신 조상 수만큼 밥을 준비하고 돼지고기 등 마른 지숙과 삶은 계란 5개를 꼭 챙긴다. 생쌀과 날계란, 동전으로 지를 만들어 지드림을 한다. 잠녀에게 사고가 나면 절대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집안에 큰 대소사가 있을 때도 물질은 않는다.

머리에 썼던 하얀 광목 수건이 까바리라고 부르는 천 모자로 바뀌고 다시 고무 모자가 됐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바다에 가는 것만은 바뀌지 않았다.

"동남쪽 샛보(아래아)름이 불면 상동 앞여 아래서는 물질을 못해 서바다까지 가야되고 갈보(아래아)름이 불면 서쪽 상동에는 못가. 어찌 알기는 여기서는 고개만 들면 어디서 보(아래아)름이 부는지 다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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