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84> 산고 심한 4·3재단 출범 ①

   
 
  2008년 11월 10일 제주4·3평화재단이 출범하던 날 참석인사들이 현판을 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그러나 4·3관련단체들은 관 주도로 파행 출범했다면서 재단 참여를 거부했다.  
 
유족회와 단체간 입장차 커 '반쪽짜리' 출범
2009년 위령제 계기로 4·3단체도 재단 참여

산고 심한 4·3재단 출범 ①
2008년 11월10일 제주4·3평화재단이 출범했다. 4·3중앙위원이자 역사학자인 서중석 교수(성균관대)는 2007년에 열린 토론회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4·3 과거사 청산보다 앞으로 있을 4·3평화재단의 활동이 여러가지 면에서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렇게 4·3문제 해결의 구심체 역할을 할 평화재단이 출범하기까지에는 산고가 심했다. 평화재단 구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파행은 오히려 4·3진영에 큰 상처를 남겼다.

4·3평화재단의 설립 필요성은 1999년 4·3특별법 입법 과정 때부터 거론됐다. 하지만 특별법 통과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관련 조항이 삭제됐다. 2006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4·3특별법 개정안에 4·3재단 설립과 정부 지원 규정이 명문화되면서 재단 설립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2008년 1월 제주4·3평화재단 설립 준비추진위원회(위원장 이상복 행정부지사)가 발족됐다. 이 준비추진위는 4·3유족회와 4·3관련단체, 도의회, 학계, 법조계 대표 등 13명으로 구성됐다. 그런데 뜻밖에 이사장 선출문제를 둘러싸고 유족회와 4·3관련단체 사이에 극명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특별법 제정 운동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협력 체제를 이뤄오던 양쪽 사이가 극한 대립 양상을 보인 것이다.

이로 인해 난항이 거듭됐다. 지루한 파행이 계속되자 다툼의 본질은 사라지고, 도민사회에는 "4·3 단체 간에 밥그릇 싸움한다"는 식으로 비쳐졌다. 이에 대한 깊은 내막을 이야기하기에는 좀 더 시간이 지나야할 것 같다.

그런데 2008년 정부 예산에는 4·3재단 사업비 20억원이 편성돼 있었다. 재단 출범에 앞서 기금 목표액이 국비 400억원을 포함해서 500억원으로 계획됐다. 그러나 정부는 국가재정상 기금을 일시에 출연하기 어렵고, 다만 기금을 적립하게 되면 발생하는 이자 수입에 해당하는 20억원을 사업비로 해마다 지원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재단 출범이 늦어지면서 2008년도 사업비 20억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됐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과도기 체제로 재단을 설립하되, 초대 이사장을 준비추진위원장이 맡는 안이 급부상됐다. 이렇게 해서 민간인을 이사장으로 추대하는 안이 보류되고, 공무원인 이상복 행정부지사를 이사장으로 하는 평화재단이 그해 11월에 이르러 겨우 닻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족회를 제외한 4·3관련단체들은 이를 정상적인 재단 출범으로 볼 수 없다면서 참여를 보이콧했다. 재단 정관에는 이사를 15명까지 둘 수 있도록 돼 있으나, 이사 7명으로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지역 언론에서는 이를 "반쪽짜리 4·3평화재단"이라고 비판했다. 

설상가상으로 과도기 체제의 평화재단이 편성한 2009년 예산안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누더기식 예산 편성, 추가 진상조사 외면, 전문성 없는 기념관 운영, 문화예술 예산의 배제, 관 주도의 재단 운영 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결국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구인 4·3평화재단이 한낱 '제주도 산하의 4·3사업소' 수준으로 격하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필자가 2009년 3월 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로 부임하게 됐다. 2000년부터 2008년말까지 4·3중앙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근무하다가 8년여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해 있던 차에 상임이사 제안을 받은 것이다. 막상 평화재단에 부임하고 보니 여러 난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논란을 빚고 있는 행방불명 희생자 표석의 비문 처리를 비롯해 준공을 눈앞에 둔 각명비의 교체작업,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의 잘못된 전시패널 수정작업은 시간적으로 촉박한 일들이었다. 더 큰 문제는 사상 처음으로 평화재단이 주관하게 될 4·3위령제 봉행행사에 4·3관련단체들의 참여 여부였다.

4·3관련단체들은 평화재단이 관 주도로 파행 출범한 것을 문제 삼아 재단이 하는 일에는 불참하고 있었다. 필자는 상임이사 부임 직후부터 4·3단체 대표들을 공식, 비공식적으로 만나 설득했다. "이사로 참여하는 문제는 나중에 검토하더라도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행사에는 참여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결국 4·3관련단체들은 4·3위령제 봉행 준비에 참여하게 됐다. 위령제 행사를 무사히 마치게 되자 그 여세를 몰아 재단 참여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드디어 4월20일 4·3연구소·도민연대·범국민위·민예총 등 4개 관련단체가 평화재단 참여를 공식 선언했다.   

이렇게 한숨을 돌리게 되자 재단 본연의 업무 정비에 눈을 돌리게 됐다. 법률이 정한 평화재단의 수행 사업은 평화공원과 기념관 운영, 추가 진상조사, 유족 복지사업, 문화 학술사업, 국제 평화 교류 등인데, 이를 위해서는 조직 정비와 보강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구상을 하던 차에 평화재단 부임 4개월여 만인 7월 초 뜻밖에도 환경부지사 내정자로 '소환' 받게 됐다. 

☞다음회는 '산고 심한 4·3재단 출범'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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