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88> 연재를 마치며

   
 
  1997년 4·3범국민위원회 출범을 계기로 전국 명망가들이 4·3진실찾기 운동에 참여했다. 사진은 1998년 4·3국제학술대회에서 왼쪽부터 박원순·양조훈·권영길·김중배·허영선·고홍철.  
 
고비마다 수많은 이들의 헌신적 노력덕분
특별법제정 당시 초심으로 문제 풀었으면


연재를 마치며

"1987년 민주화 이후 4·3위원회 설립까지의 13년간의 진실규명 운동사와 2000년 8월 4·3위원회 설립 이후 10여년간의 활동사는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공적인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의 사례이다"

2008년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서 세계적으로 확산된 과거사 위원회 전체의 흐름과 4·3위원회의 활동을 비교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헌준 박사의 표현이다. 그는 4·3진실규명 운동사의 성공적인 근거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진실의 규명, 둘째, 4·3위원회의 지속적이고 영향력있는 활동, 셋째, 4·3평화재단 설립을 통한 영구적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모델 확보 등이다.

군사정권 시절 금기였던 4·3이 오늘의 위상을 획득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눈물, 피나는 투쟁이 있었다. 뜻있는 제주출신들의 결집된 역량, 전국 각지의 존경받는 지성인들의 소신 있는 행동, 멀리 일본에서의 진실규명 열망 등이 결합돼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고비 고비마다 기적적으로 매듭이 풀리는 것을 체험하면서 4·3영령까지도 돕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필자는 1988년 엉겁결에 4·3취재반장을 맡아 이 일에 뛰어들었지만 지하에 갇혔던 4·3이 이렇게 대명천지에서 당당히 재평가를 받는 날이 있으리란 확신은 없었다. 수많은 유족들로부터 '빨갱이' 누명을 벗겨 달라는 절박한 하소연을 들으면서 최고의 목표로 세웠던 것이 '대통령의 사과' 정도였다.

혹자는 냉동됐던 4·3문제가 풀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거나, 역사의 필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연재에서 보듯 어느 것 하나 쉽게 매듭이 풀린 적은 없었다. 지난날을 복기해보면 순간순간마다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결합된 힘들이 모여 난관을 헤쳐올 수 있었다.

4·3 자체가 하나의 역사였다면, 덮여진 4·3을 대명천지로 꺼내는 진실규명사도 의미있는 '새로운 역사'라고 감히 생각한다. 4·3의 진실규명사는 2000년 4·3특별법 제정을 기점으로 크게 갈린다. 특별법 제정 이전의 50년은 제주도민과 유족들이 마음을 졸이며 4·3의 진실규명과 억울함을 호소하던 시기였다면, 특별법 제정 이후의 10여년은 국가 차원의 4·3 진실규명과 대통령의 사과, 4·3평화재단 설립, 명예회복 조치 이행 시기로 구분지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4·3 진실찾기 운동을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난 행운이 있었다. 처음 4·3취재반장을 맡아 고심할 때 현기영 선생, 송상일 국장은 내 마음 속의 정신적 멘토였다. 김종민·김애자 등 4·3취재반 기자들은 나의 부족한 점을 메워준 훌륭한 동역자였다. 그들이 없이 그 많은 고비들을 헤쳐왔을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유족회를 비롯한 4·3관련단체의 도움도 컸다. 내 아내(함옥금)도 한몫을 했다. 옆에서 묵묵히 내 작업을 돕던 아내는 끝내 미국의 책임문제를 다룬 4·3 연구 논문을 써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4·3 진실찾기 운동에 앞장섰던 제주사람들은 아주 많다. 4·3연구소와 도민연대, 서울의 범국민위원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4·3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유족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화예술인들은 소설과 시, 그림, 연극, 음악, 영상 등의 작품으로 4·3의 참모습을 드러내려 노력했다. 치열한 '기억의 투쟁'을 벌인 것이다. 일일이 거명하지 못한데 대한 양해를 구한다.

1997년 서울에서 4·3범국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전국적인 명망가들이 대거 4·3 진실찾기 운동에 참여했다. 또 4·3특별법 제정과 진상조사보고서 채택과정에서 핵심적으로 활약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추미애(국회의원), 박원순(변호사·서울시장), 박재승(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등을 꼽고 싶다. 또 일본에서 활약한 인물로는 김석범·김민주·문경수·고이삼·조동현 등의 이름을 기록하고 싶다.
필자는 4·3취재반장,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 4·3위원회 수석전문위원, 4·3평화재단 상임이사, 4·3담당 부지사에 이르기까지 20여년을 그 복판에 있었다. 이 연재물은 고비마다 현장에서 몸으로 부닥치며 체험했던 내용들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은폐·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보수세력의 집요한 4·3 폄훼 시도에 대한 응전 과정에서 겪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엮는데 비중을 두었다. 그런 한편으로 그 시대의 진실찾기 운동사를 함께 살피는 일에도 신경을 썼다. 그럼에도 누락된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아직도 풀어야할 4·3 과제는 많다. 4·3진영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있다. 이 기록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역사적인 교훈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이 시점에서 추구해야 할 기준은 4·3특별법 제정운동 당시의 초심을 되찾는 것이다.

끝으로 2년간 4·3진실찾기 기록을 정리할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준 제민일보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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