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32. 만장굴과 부종휴 선생

▲ 만장굴 내부 모습.
제주 세계자연유산 핵심 거문오름용암동굴계
길이·규모·복잡한 통로·내부 지형 보존 양호
 
# 세계자연유산 등재 6주년
 
제주 세계자연유산이 등재 6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을 시작으로 2007년 세계자연유산, 2010년 세계지질공원 인증으로 유네스코의 자연과학분야 3관왕이라는 타이틀을 소유하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은 한라산 천연보호구역과 뱅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을 포함하는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와 성산일출봉이다.
 
제주세계자연유산의 가치는 2006년 10월 제주도에서 현지조사를 수행한 세계자연보존연맹(IUCN)이 2007년 5월 제출한 기술심사 보고서에 잘 나타난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심사보고서에서 '다른 지역과의 비교' 항목과 관련해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용암동굴"이라며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동굴들은 그 길이나 양적 규모, 복잡한 통로 구조, 동굴 내부의 용암 지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 점, 다양한 장관을 이루는 2차 생성물, 접근 용이성, 그리고 이들의 과학 및 교육적 가치가 크다는 점에서 세계적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세계 다른 지역에도 길이나 양적 측면에서 제주도 용암동굴에 필적하는 것들이 있으나 이들은 보호 수준이나 접근성, 훼손도 측면에서, 혹은 형성 내지 보존도 측면에서 제주도에 많이 뒤떨어진다"고 평가하고 있다.
 
# 현재까지 140여개 용암동굴 밝혀져
 
이처럼 제주도의 용암동굴은 세계적으로 그 가치가 뛰어나다. 그런데 얼마 전 섭지코지에서 콘도미니엄 신축공사 중 공사 현장에서 천연 용암동굴이 발견됐음에도 이를 숨기고 공사를 강행한 업체가 형사고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화재청의 현지 조사결과 동굴은 수직형태로 입구의 좌우 폭은 4m, 높이 1.6m, 수직동굴 입구까지의 길이는 3.6m, 동굴의 수직 깊이는 2.2m 규모였다.
 
제주세계자연유산의 핵심이 동굴임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얘기다. 현재까지 밝혀진 제주도의 용암동굴은 14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자연보존연맹은 심사보고서에서 제주도의 다른 용암동굴에 대해서도 세계자연유산으로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기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동굴뿐만 아니라 다른 동굴들도 하나같이 소중하다고 여겨야 한다는 얘기다.
 
▲ 만장굴 조사 후 기념 촬영하는 부종휴 선생(뒷쪽 왼쪽에서 세번째).
동굴의 가치를 알리는 과정에서 비교되는 사례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세계자연유산의 핵심 동굴 중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만장굴 발견 과정에서의 부종휴(夫宗休, 1926∼1980)선생 얘기다. 부종휴선생은 1946년 만장굴을 시작으로 1969년에 빌레못동굴을 발견, 측량을 실시했던 선각자다. 이어 1971년 2월에는 서귀포 미악산 동쪽에서 제주도 최초로 발견된 수직굴인 모시마루굴과 위콧대마루굴 등 4개의 굴에 대한 조사를 벌여 동굴의 규모를 밝혀내고 1973년 6월에는 한들굴에서 고고자료를 발견하기도 했다.
 
부종휴 선생의 업적은 용암동굴의 발견에 그치지 않는다. 한라산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본인의 글에서 "식물을 채집하면서 새로운 미기록식물 400여종을 추가, 한라산 식물의 총수가 1800여종에 이르게 된 것은 나의 큰 자랑이기도 하다"고 자평하고 있을 정도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내용은 부종휴 선생 본인이 제주도지에 기고했던 원고를 다듬은 것이다. 한라산과 관련된 부종휴 선생 이야기는 2009년 제주도에서 펴낸 '제주세계자연유산, 그 가치를 빛낸 선각자들'이라는 단행본에 쓴 필자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아울러 세계자연유산센터 내에 부종휴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공간이 조성되기를 기원하면서.
 
# 김녕국민학교 꼬마탐험대
 
1946년 부활절 날 모처럼만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 김녕국민학교 교사인 부종휴다. 이때 부종휴는 제1입구 동북굴 630m를 확인한 후 그 다음 주에 김녕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로 꼬마탐험대를 조직해 2차 조사에 나선다. 꼬마탐험대는 길이와 높이, 온도 등 기본적인 조사만을 하는 작업이었지만 조명도구가 없던 시절이라 횃불을 들고 가야 할 조명반을 비롯해 측량반, 기록반, 보급반 등 30여명에 달했다.
 
꼬마탐험대와 관련해 부종휴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일반은 꼬마탐험대라 하면 무시하겠지만, 비록 초등학교 학생이었지만 김녕 부근에 있는 20여개의 굴을 답사한 경험도 가지고 있고 한라산까지도 갔다 온 멤버들"이라 설명하고 있다.
 
꼬마탐험대원들은 제1입구를 출발 300m 지점에서 길이 막히자 실망하며 돌아갈까 고민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 지형을 살펴 한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구멍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그곳을 통과하며 이제껏 사람들이 다녀 본 적이 없는 만장굴로 들어선다. 오로지 위에서 떨어진 바윗덩어리들이 쌓여있는 곳, 대원들은 세기의 발자국을 남긴다는 환호 속에 전진을 계속했다.
 
굴 입구에서 1.2㎞ 지점, 즉 낙반이 마치 돌 동산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 위를 보니 희미한 빛이 보이는데 현재의 제2입구 지점이다. 그런데 돌 동산을 막 올라서니 썩는 냄새가 진동, "아마 소나 말이 떨어져 죽은 것"이라 마음을 달래며 냄새가 나는 곳으로 가 보니 사람의 시체였다.
 
이에 그 용감(?)한 꼬마탐험대원들도 공포분위기 속에 놀라 도망치기 시작하고 부종휴는 시체의 인상착의를 확인한 후 대원들과 후퇴했다.
 
이 소문은 금세 마을에 퍼져 부모들이 무당을 불러 자식의 넋을 들이는 굿을 하는 등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체는 그날 밤 인근마을 사람들이 동원돼 인양했는데 행방불명된 지 40일 밖에 안 된 사람으로 추락사했던 것이다.
 
# 3차 답사 만에 동굴 끝 발견
 
▲ 만장굴 내부의 용암석주. 높이가 7m에 달하는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경우다.
한편 3차 답사는 그로부터 1년 후인 1947년 2월말에 진행됐는데 석유 80ℓ, 횃불 50본을 동원해 제2입구에서 2㎞ 가량을 전진하며 측량했으나 석유가 바닥나는 바람에 철수하고 1개월 뒤 교사까지 참여한 가운데 4차 답사에 나선다. 이때 굴속에서 전진을 계속하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이 마치 땅속을 향해 파 들어가는 착각마저 들게 되자 참여한 교사들이 철수하자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에 부종휴는 "지금부터 전 대원은 한 곳에 모여 앉아서 현 위치에서 절대 벗어나지 말고 횃불도 한 개만 사용하라"고 지시를 내린 후 횃불 하나에 맥주병으로 석유 한 병을 들고 혼자 전진한다. 부종휴가 이처럼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번 답사 때 박쥐를 봤기에 머지 않는 곳에 지상과 통하는 곳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인데 용감한 꼬마탐험대원 몇 명이 부종휴를 따라 나선다.
 
그로부터 200m. 동백꽃이 만발하고 겨울딸기가 열매를 맺는 등 별천지와도 같은 동굴의 끝을 확인하게 된다. 이어 동굴의 끝을 봤다는 증거물로 지상에서 함몰된 그곳에서 자라던 동백나무 가지를 증거물을 꺾고, 줄자를 나뭇가지에 매달아놓고 철수한다. 본대에 가까워지자 "동굴의 끝을 발견했다"고 소리치자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은 믿지 못하겠다며 "거짓말"이라는 말이 메아리친다. 이때 동굴 끝의 동백나무 가지를 내 보이자 모두들 감격에 겨워 "만세"를 외치며 서로 껴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드디어 해낸 것이다. 마침내 답사가 완성된 것이다.
 
한편 부종휴는 동굴의 끝이 지상에서 어느 곳인가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에 나선다. 우선 지도상에서 함몰된 곳을 찾는 한편 이전까지의 답사를 토대로 거리를 측정한 결과를 바탕으로 마을사람들이 '만쟁이거멀'이라고 부르는 곳을 유력한 지점으로 여기고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5차 조사에 나선다. 이번에는 부종휴가 강사로 나가던 김녕중학교 학생들이 굴속에 투입되고 꼬마탐험대는 굴의 끝 지점의 지상으로 추정되는 '만쟁이거멀'이라는 곳에 대기토록 했는데 3시간의 소요 끝에 이들이 만나는 것으로 최종 확인한다. 이때 '만쟁이거멀'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굴 이름이 '만장굴(萬丈窟)이라 명명한 것이다. <사진작가>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