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화유산 제주잠녀] 6부 제주해녀 문화 목록 4. 해신당

▲ 칠머리당은 산업·도시화로 당을 옮긴 대표적인 사례다. 해양경찰청사를 짓는 과정에서 현재 사라봉 기슭으로 옮겨졌다. 사진은 칠머리당영등굿 모습.
잠녀문화 대표 아이콘…바다 가는 길목 100여곳 이상 존재
신화·역사 등 지역성 반영, 산업·도시화 바람에 훼손 가속
공동체 특유 정신세계, 시대 변화 수용 '지속가능성' 확보
 
음력 정월이면 바닷가 마을은 누가 시킨 것처럼 정숙해진다. 날을 잡아 마을 전체가 모이든, 개별적으로 정성을 올리든 바다로 나가는 길에 있는 특정한 장소를 찾는다. 해신당으로 통칭되는 '의지(意志)'이자 '의지(依支)'의 공간이다. 환경이 바뀌며 달라지기는 했다. 같은 이름을 쓰는 것들과 비교해 그다지 거창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것들은 신화가 된다.
 
도깨비가 산다
 
'해신당(海神堂)'에는 도깨비가 산다. 「제주도무속연구」(현용준, 1986)에 실린 내용을 정리해보면 도채비·영감·참봉 등으로 불리는 제주의 도깨비가 요왕신, 선왕신, 배서낭·풍어신, 당신(堂神)의 성격과 어우러지며 해신당신으로 모셔졌다. 전·현직 잠녀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해가 된다.
 
일단 해신당은 잠녀 외에도 어업인 등 바다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안전과 풍어, 무사와 안녕을 비는 의지의 공간으로 정리된다.
 
마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본향당과는 별도로 해신당 계통의 당을 따로 둔 곳도 있고 해신당신을 마을 본향당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 가파도 상동 할망당.
'개할망당'이란 같은 이름을 쓰는 해신당도 있다.
 
사실 제주에서는 바닷가(포구)를 '개' '성창' '돈지'라고 불렀다. 개당, 돈짓당은 그저 '바닷가에 있는 당'이란 구분이다. 갯그리 할망당, 갯맛 할망당, 돈지할망당은 해신당에 모신 '신'이 여성이란 의미다.
 
대부분 초하루와 보름에 맞춰 제를 올린다. 개날(戌日)에 맞추는 곳도 여럿 된다. 이를 놓고 포구를 뜻하는 한자 '개(浦)'를 음차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풍습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한경면·한림읍 등지는 간지에 의해 제일이 정해지기 때문에 술일당·개당이라는 이름을, 구좌·성산읍 지역은 개당의 제일이 매7일이라고 해서 '일뤠당'이라고 불렀다. 날이야 어찌됐든 그 의미나 방식은 구체적 기록이 아닌 구전(口傳)을 통한 민속지식으로 이어진다.
 
도내 100개 어촌계를 기준으로 할 때 어촌계별로 최소 1곳 이상의 해신당이 있었다. 잠녀당과 어부당으로 나눈 곳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해신당이 훼손되거나 사라졌다. 제주도와 제주도발전연구원의 잠녀문화유산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문화재 지정이 가능하거나 검토할 수 있는 수준인 해신당은 73곳 정도 된다. 이중 일부는 '복원'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기에는 무속신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컸다. 많은 수의 해신당들이 일제 식민지 시절 지역 전통을 말살하려는 움직임으로부터 시작해 1970년대 새마을 운동, 1980년대 산업화 바람 등에 휩쓸리며 '사라지는 것'들에 편승했다.
 
▲ 종달리 생개님돈짓당.
살아가는 이야기가 전설로
 
흔해 보이나 흔하지 않은 것이 이 해신당이다. 마을마다 그 사연이 구구절절하다. 그 안에는 예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고 역사적 사실이 접목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 잠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도 있다.
 
조천읍 신흥리 본향당에 좌정한 남당하르방과 남당할망, 볼래낭할망의 사연이 그렇다. '볼래낭할망'은 바다 물질을 다녀오다 왜인 선원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 한 마을 어린 잠녀가 신당 나무 밑까지 도망쳐와 죽어 본향신이 되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때문에 마을에서는 지금도 남성 출입이 엄격히 금하고 있다. 남성이 당 앞을 지날 때는 쳐다봐서도 안 되고 아예 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제사를 지낼 때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은 아예 참가할 수 없었다.
 
조천읍 조천리 세·할망당(고망할망당)은 과거 쌀을 싣고 오다 침몰 위기에 처한 배의 구멍을 몸으로 막아줬다는 뱀을 모신 당이다. 제주시 내도동 알당(두리빌렛당)에도 비슷한 내력담이 전해진다.
 
▲ 금능리 본향원(사진 왼쪽)과 귀일리 해녀당.
한림읍 금능리 능향원에서는 무속 신앙과 포제가 함께 치러지는 본향당이 있다. 마을에는 처음 해신당의 특성을 지닌 할망당과 하르방당인 소황당이 있었다. 이를 합제하여 유교식 제사를 올리게 된 것 역시 시대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의식은 유교식 포제 형식으로 이뤄지나 잠녀들이 개인적으로 제물을 올리는 것이 허용된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애월읍 신엄리 할망당에도 유교식 마을 포제 이후 제관들이 이동해 제를 올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불필요한 손질로 훼손된 사례도 있다. 하도리 각시당은 몇 년전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통해 시멘트로 말끔하게 정리가 됐다. 자연석이던 각시당은 재정비 과정을 거치며 시멘트 제장이 설치됐고 이후 신당으로 영험함이 떨어졌다는 평을 받았다.
 
물질 위한 마음 다져
 
잠녀들에게 해신당은 의지(意志)의 공간이다. 무사안녕을 빌거나 비념하는 행위는 다시 바다에 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잠녀들 중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는 이가 없다. 밭일은 혼자서도 해도 물질은 혼자서는 못한다. 세월의 무게가 잠녀들의 등허리를 칭칭 감은 연철보다 훨씬 묵직하지만 바다로 나서는 걸음을 붙들지는 못한다. 그보다는 작업 중 예상치 못한 사고들이 잠녀들을 위협한다. 묘한 것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를 보고 겁을 먼저 집어먹지만 결국 하면 할수록 강해진다. 단련이 되는 것이다. 해신당은 그런 마음을 다잡는 공간이기도 하다.
 
남원읍 위미1리 '다막낭모(아래아)실돈지할망당'에는 매달 물질을 앞둔 잠녀들이 찾아와 "이번 달도 소망일게 해줍서"라고 빈다. 이때 쌀점을 위한 쌀을 준비한다. 쌀알을 집어 6알이면 '육중복덕'이라고 해서 최고로 좋은 징조라 여겼다. 만약 홀수를 집으면 다시 집어 짝수가 되게 했다. '이번 물질을 무사히 마치게 해 달라'는 바람이 1순위라면 '이번 물질에서 물건을 많이 채취하게 해 달라'는 요청이 2순위 쯤은 되는 셈이다. 고 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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