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화유산 제주잠녀] 6부 제주해녀 문화 목록 13. 해녀노래 2

'억척스럽다'에 가려진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
생사 넘나드는 힘든 작업·고달픔까지 노래 담아
작업기술 등 상세…현실적·대범한 태도 등 다양
'잠녀'를 놓고 한 많고 억척스런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험한 작업 환경에 사회의 불편한 시선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들로 '대물림'을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과연 그럴까. 잠녀들이 주고받는 사설 속에는 그것과는 분명히 '다름'이 있다.
힘 넣고 빼며 고달픔 잊어
물질은 예전이고 지금이고 험하고 위험한 일이다. 해녀노래 사설 중에는 직업의 한계와 작업의 고달픔, 비극적인 인생관을 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혼벡상지(혼백을 넣은 함)'나 '칠성판(북두칠성을 본떠 7개의 구멍을 뚫어 놓은 관 속의 바닥에 까는 널)'을 진 채 물에 드는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흥얼댄다. 오히려 감정이입이 돼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혼벡상지 등에다 지곡/가심 앞의 두렁박차곡…아이고도 생각하민/서울러라 불쌍하다" "저 산천에 푸숩새는/해년마다 오련마는/우리야 인생/한번 가면은/돌아올 줄 몰라지네" "탕댕기는 칠성판아/잉엉사는 맹정포야/못할일이 요일이여/모진 광풍 불질 말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일을 마치 푸념처럼 쏟아내는 경지는 다른 노동요에서는 감히 찾을 수 없다.
이 것만으로는 한없이 가라앉아 깊은 물속에서 박차고 올라오는 힘이 부칠 수밖에 없다.
잠녀들의 억척스러움은 상대적으로 남성의 역할을 약화시켰다. 단순한 설(設)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해녀 노래의 사설이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내뱉는 것이 깊이 참았던 숨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미역 등을 공동 작업 할 때나 바다 작업이 한창일 때 '품중' 역할을 하는 남편이나 가족들의 모습에 '해녀 남편은 집에서 애기나 본다'는 속담도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렇다고 한탄만 했다면 먼 바다까지 노를 저어 나가 작업을 하고 다시 노를 저어오는 일이 가능했을까.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던 특유의 성질은 수십번 반복되는 후렴구에서 엿볼 수 있다. 한 쪽에서는 "쳐라 쳐라"하고 추임새를 넣고 다른 쪽에서는 "쳐라 베겨"한다. "이어싸하 허, 이어싸나 힛(헷)"하는 후렴은 주고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힘을 넣었다 뺏다 하는 호흡에 가깝다. 심지어 "짱으랑 집을 삼앙/눗고개랑 어멍을 삼앙/요바당에 날살아시민/어느 바당 걸릴웨시라"하고 툭 던진다. '모자반 덩어리는 집을 삼고, 파도 고개는 어머니를 삼으면 어느 바다인들 거칠 게 없다'는 얘기가 그 옛날 어머니들의 입에서 나왔다.

내려갈 땐 눈물 올라올 땐 한숨
노동요라고 하지만 '해녀노래'는 잠녀로서의 마음가짐과 작업 방식, 과거 출가했던 지역의 사정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잠녀 전승·보존 장치를 고민하며 '해녀노래'를 상위에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리잔을 눈에 끼곡/테왁을 가슴에 안고/무쇠비창 손에 차곡/지픈물속 들어보난/수심전복 하서라마는/내숨란 못 하여라" 이른바 작업의 순서다. 물안경을 눈에 끼고, 테왁을 가슴에 안는다. 무쇠 빗창은 손에 드는데 때로는 손목에 걸어 불편함을 덜었다.("등도빗창 홀목에 걸어" 등도빗창 손목에 걸어)
작업을 할 때 손으로는 물을 헤집고 발을 연신 차대는 것으로 깊은 바닥까지 내려간다.(앞발로는 허우치멍/뒷발로는 거두치멍)
잠녀들이 알아야할 것들은 계절 혹은 시기에 따라, 때로는 작업할 해산물에 따라 달라진다. 일일이 적어 공부해도 모자랄 산지식은 사실 해녀 노래를 통해 전해졌다.
강인해보여도 여성이다. 바다가 늘 편한 존재는 아니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작업에 나서고 작업을 마치면 참은 숨을 쏟아내는 척하며 안도한다. (나려갈 땐 눈물이곡/올라올 땐 한숨이여) 숨비소리가 유난히 길고 날카롭게 바다를 후벼 파 뭍에 닿는 이유이기도 하다.
깊은 물 속 들어가 보니 전복은 많지만 그에 비해 숨이 짧다는 것은 상기 시킨다. "앞름은 가작 가치/불어나온다 뒷발로랑/뒷름은 가두잡아/이화넝창 가고나보자/부모돌랑 돛 들어라/물질하라 물질하라" 앞바람이 바로 불어오니 물질을 하기 위해 돛을 단다. 절대 혼자 작업은 않는다. 노래에서처럼 부모와 함께 거나 적어도 둘 이상 짝을 이뤄 바다에 나간다.
소리 좀 한다는 잠녀들마다 사설은 조금씩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다름 아닌 지명이다. 한라산을 등에 지고 출가를 하는 얘기나 성산포나 비양도 같은 지명도 등장한다. 자구내니 홍종개니 당시 감태 같은 물건이 많이 나는 바다밭 얘기도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다른 지명들이다. 진도, 울산, 목포, 부산, 군산, 충남, 인천, 한강(서울), 강원도 금강산까지 등장하고 '오사카 동성구 12번지'하는 비교적 자세한 일본 주소도 나온다. 사설을 따라가 보면 노를 젓다 부러지거나 선흘곶 등 중산간을 누볐고 닻줄 따위가 망가지면 부산·인천에서 조달했다. 손목이 부러지거나 하는 큰 부상을 당하면 '병원장'이 있는 부산으로 달려갔던 모양이다. 그 모든 것들이 200편에 이르는 해녀 노래들 속에 담겨 있다.
바다도 그렇고 섬을 벗어나 넓은 바다에서 작업을 했던 것은 잠녀들의 가슴을 담대하게 했던 것 같다. "시앗이렌 튿으레가난/가른밧헤 메마꽃이/허원 듯이 나안자서라/내눈에도 저만한 것이/님의 눈에는 더할말시랴"(시앗이라고 혼쭐을 내려고 가보니/기름진 밭에 메꽃처럼/훤하게 나앉아 있다/내 눈에도 저만한 것이/님의 눈에는 더할 말이 있으랴)라니.
그들 나름의 해학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잘잘가는 잣나무 배냐/솔솔가는 솔나무 배냐"물으며 웃음을 쏟고, "총각차라 물에 들개/양식싸라 섬에가게/우리선관 가는듸랑/메역좋은 여끗으로/놈의선관 가는듸랑/감테좋은 홍동개로" 말짱한 총각에게 물에 가서 작업을 하게 쪽을 져 여장을 하라고 으른다. 고 미 기자 ※ 이 기획은 ㈔세계문화유산보존사업회와 함께 합니다.
고 미 기자
popmee@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