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공자 「논어」 - 공부는 왜 해야 하는가

▲ 제자들을 가리치는 공자
'학이시습지' 배움은 지속적으로 때에 맞게 행해져야 하는 것
'곤이불학' 어려움 겪고도 배우지 않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다보면 자주 난감한 상황과 부딪힌다. 다소 태도가 바르지 않거나 공부 시간에 딴전을 피우는 학생들에게 "바르게 앉아라"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충고를 하면, 대번에 "왜요?"라는 반문이 되돌아온다. 대답하기 참 난감하다. "그게 사람의 도리이거나 바른 태도이다"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이 스스로 들면서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하고 받아들일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것은 비단 필자 만의 주관적 경험은 아닐 것이다. 요즘 학교 풍경이 대체로 이러할 것이다. 그래서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인성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밥상머리에서부터 바르게 앉고, 웃어른에게 존댓말을 쓰라고 가르치면 되는 것인지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해보는 것은 말로 가르칠 수 없다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스스로 알아가게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추천하게 되는 책이 「논어」다.
 
「논어」 하면, 나이 든 어른들이나 읽는 고리타분한 책, 아니면 한문 공부하기에 좋은 책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논어」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삶에 대해, 사람됨에 대해, 공부에 대해, 바른 생활태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새기며 읽어볼 만한 고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즘은 출판문화가 발전한 덕에 다양한 대상에 맞게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재편집되거나 풀이가 쉽게 되어있는 책이 많이 나와서 청소년들도 잘 고르면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필자도 한문공부를 위해서 「논어」에 나온 구절들을 따라 써 본 적이 있다. 하루에 한 구절씩 따라 써보자고 마음먹었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포기하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인가, '왜 나는 매번 실패하면서도 다시 시도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즉, '공부는 왜 하려고 하는 걸까'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논어」에서 찾을 수 있었다. 
 
▲ 공자의 모습
「논어」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學而 第一(학이 제일)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공자께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누구나 한 번쯤 들었고, 익히 알고 있는 구절일 것이다. 공자에게 '學(학)'은 기쁜 일이다. 배움 그 자체가 기쁜 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찌 배움이 즐거운 일이란 말인가. 배운다는 것. 한자로 '學'은 '배운다'는 뜻이다. 
 
이 한자의 기원을 살펴보면, 우선 집에서 두 손(臼와 비슷한 모양)으로 매듭(爻) 묶는 방법을 배우는 아이(子)의 모습을 나타냈다는 설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 사용했다. 집도 손으로 짓고, 신발도 손으로 짚을 꼬아 끈을 만들어 신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워야만 만들어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배우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배운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지만 요즘처럼 모든 게 다 만들어져 나오는 시대에는 생활에 필요한 것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으니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모든 말은 시대에 따라 의미해석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돈만 있으면 다 살 수 있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배워야 하는 건 더 많아졌다. 하다못해 새로 시판되는 휴대전화를 구매했다 하더라도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노인들을 위한 스마트폰 교육이 평생교육 기관에서 행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이런 예는 배움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예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 세상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에서 오히려 배움의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수없이 쏟아지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얽히고 설킨 복잡한 인간관계, 경쟁관계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게 좋은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게 아닐는지.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삶은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표류하고 말 것이라는 걸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거대한 강물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내맡겨 흐르는 대로 살아도 무방하다면 배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논어」의 위 구절에서 '時(시)'라는 글자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時'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때때로'라고도 하지만 '때에 맞게'로 해석하기도 한다. 둘 다 의미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즉, '배움은 때때로, 때에 맞게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배움의 지속성과 적기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는 구절이라 이해한다. 
 
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공자왈 생이지지자상야, 학이지지자차야, 곤이학지, 우기차야, 곤이불이, 민사위하의).
 
공자가 말씀하셨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이가 최상이고, 후천적으로 배워서 아는 이가 그 다음이며,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서야 배우려는 이는 또 그 다음이다.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앞뒤 꽉 막힌 사람이 가장 아래이니라."
 
태어나면서 아는 이가 누가 있으며, 배우면 저절로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위의 구절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절망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살면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즉 '곤경'에 처했을 때가 배움의 적기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실제로 어려운 일을 당함으로써 배우게 되는 것이 많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하며, 나의 극기를 시험해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탐색해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알아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위 구절은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것이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남의 탓을 한다거나 환경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기방어적 태도이기도 하지만 반성적 사고를 하지 못해서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부모를 원망하고, 시대를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곤이불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예로부터 훌륭하다는 평을 받는 인물들은 '곤'을 잘 활용한 사람들이다. 위기를 호재로 다룰 줄 아는 지혜, 그것은 배움의 태도에서 나온다.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자왈 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 
 
'공부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누구를 위한 공부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는 구절이다. 
 
공부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공부를 남을 위해서 한다고 질타하고 있다. 어쩌면 한창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새겨들어야 할 구절인 듯하다.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사리분별이 가능해져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고,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을 행하려하지 않게 된다. 또한 내가 귀한 것처럼 남도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공부의 결과이다. 
 
그러니 공부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내 영혼을 살찌우는 일이며, 삶의 의미를 수시로 깨닫게 되어 기쁨이 배가되는 행위이다. 그래서 공자는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말한 것이리라. 제주대 평생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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