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어린시절 자신에게 행해졌던 아버지의
절대적 지배권에 대한 원망·분노 토로
지난 시간은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내온 편지」를 살펴보았다. 충신으로서, 아버지로서, 남편, 아우로서의 마음과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한 개인이 처한 처지와 상황, 감정이 편지라는 글의 형식에 녹아들어 깊이있는 교감을 만들어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편지를 읽다보면 마치 내가 글을 쓰는 이인 것 같고, 편지를 받아든 이 같은 기분, 그것은 아마 구체적 실체들이 글을 통해 감각과 감성이 열리면서 동일화의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 처지, 대상에 따라 반응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강한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다. 이를테면 '아버지'에 대해 모든 이가 고마움이나 존경심을 갖지 않듯이 말이다. 이에 떠오르는 작품 한편이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엮은 모음집이다. 아버지에게 보낼 양으로 쓰긴 하였지만 실제로 보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 11월 카프카는 폐결핵에 걸려 체코의 셀레젠에 있는 슈튀들이라는 하숙집에 머물면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34줄의 타자 용지로 45쪽에 달한다. 그가 죽기 5년 전의 일이다.
카프카는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어렸을 때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한다. 카프카 가문의 특성이라고 하는 '강한 생활력, 왕성한 사업욕, 끊임없는 정복 의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버지는 왕성한 식욕과 건강, 열정, 자부심, 끈기, 순발력, 사업수완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왕성한 활동력으로 사업을 일으키고, 남부럽지 않은 경제력으로 처자식을 먹여살리는데 매진했다. 그래서 자식인 카프카도 용감한 소년으로 키우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완력으로 다스리기도 하고, 고함을 치며 화를 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달라며 칭얼대는 카프카를 침대에서 들어내 발코니형 복도에 속옷바람으로 세워두기도 하였다. 어찌 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집안 풍경이다. 자녀양육에 있어 부모의 가치관은 절대적 지배권을 갖는다.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키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강압적이고, 호되게 구는 일도 흔하게 벌어진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여느 부모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이런 아버지의 행동에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치부되었다며 강한 거부감과 분노를 토로한다.
옛날부터 아버지는 저한테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제가 없는 것 없이 편안하고, 따뜻하고, 풍족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저에 대한 질책의 말로 하셨지요. 그건 이런 말들이었지요. 그 말들을 저는 하도 들어서 제 머릿 속에는 분명 여러 줄의 고랑이 새겨져 있을 겁니다. "일곱 살 때부터 나는 벌써 손수레를 끌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녀야 했단다", "우리는 모두가 한 방안에서 잠을 자야 했지", "우린 감자만 있으면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단다", "겨울에 입을 옷이 부족해서 나는 여러해 동안 다리 여기저기가 갈라터졌단다", "어린 아이였을 때 나는 벌써 피섹으로 장사하러 다녀야 했단다", "집에선 한푼도 받은게 없었고, 군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지. 오히려 집으로 돈을 부쳤단다" 그런 말들은 다른 상황에서라면 뛰어난 교육적 효과를 낼 수 있었을 테지요. 아버지가 겪으셨던 것과 동일한 고생과 가난을 이겨내는데에 자극이 되고 힘이 될 수 있었을 테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결코 그런 걸 원하셨던 게 아니었습니다. 형편은 어쨌든 아버지의 고생 덕택에 나아지게 되었고,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온갖 고난을 딛고 출중하게 일어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지요. 억지를 쓰든지 뒤집어엎든지 어떻게든 그런 기회를 만들어 집을 뛰쳐 나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이재황 역
위의 편지를 읽다보면 카프카의 편지인지, 아이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인지 구분이 안된다. 어린 시절 우리 부모들이 우리에게 한 말들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모들도 이러저러한 잔소리를 늘어놓고 마지막에 붙이는 말이 있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 맞는 말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 그런 말들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 아니라 그야말로 잔소리였다. 비약하자면 피가 거꾸로 솟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카프카는 따지고 있는 것이다. "형편은 어쨌든 아버지의 고생 덕택에 나아지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온갖 고난을 딛고 출중하게 일어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카프카에게 필요했던 건 자유의지대로 살아볼만한 기회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탐색하고, 선택하고, 실현해볼만한 기회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노심초사 유약한 아들을 믿지 못하였고, 그런 기회를 주는 것보다 자신이 만든 부와 지혜를 그냥 떠먹으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소망은 자주 아들과 불일치와 부정적인 대립감정만 양산하고 말았다.
순수한 뜻을 지닌 선한 행동이라 해도
상대를 통제하고 지배하고자 한다면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고발
자신의 뜻대로 다 잘될 것이라는 건 아버지의 오산이었고, 그로 인해 아들에게 남긴 건 '죄의식'과 '수치심'이었다. 그래서 카프카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버지 앞에 서기만 하면 자신감을 잃고 그대신 한없는 죄의식만 갖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자신은 "아버지의 영향력이 강력하고도 엄격하게 작용하는 숨막힐 듯한 테두리 안에서 살았는데 그러지말고 과감히 뛰쳐나갔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감이 함께 묻어있는 있는 표현이다. 어딜 가도 아버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던 자신을 한탄하면서 그 뿌리에는 아버지의 강력한 지배욕과 불신이 있었다고 항의한다.
아버지는 가게에서나 집안에서나 틈만 나시면 저한테 세상 사람들에 대한 불신을 가르치고자 하셨지요. (어린시절 제게 어떤 식으로든 중요했던 사람치고 아버지한테 적어도 한 번쯤 묵사발이 되도록 욕을 얻어먹지 않았던 사람이 있으면 한 번 대보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그런 불신을 받는 경우에도 별로 괴로워하시는 기색이 없으셨지요.(아버지는 워낙 강하셔서 그런 일쯤은 충분히 견뎌내실 수 있었고, 더군다나 불신은 사실상 어쩌면 지배자의 한 상징일 뿐이었을 겁니다) 어린 제 눈으로는 어디서도 그런 불신을 확인할 수 없었지요. 가는 곳마다 감히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들만 보였으니까요. 그 불신은 바로 제 마음 속에서 제 자신에 대한 불신이 되었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딜 가도 아버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할 수 있지요.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이재황 역
편지를 읽다보면 답답한 마음이 든다. 강력한 아버지의 힘과 권위에 억눌려 한마디도 하지못하는 유약한 한 아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겨우 자라서 자신의 말을 글로 옮길 수 있게 되었을 때, 남몰래 골방에 틀어박혀 그동안 다하지 못한 말을 밤이 새도록 털어놓는 한 청년의 굳은 표정도 함께 떠오른다. 또한 그때가 폐결핵을 앓고 있던 시점이라 하니 빛을 잃어가는 자신의 몸과 영혼을 마주한 작가의 마음은 오죽 하였겠는가.
아버지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벗어나고자 유대교를 찾고, 여인을 사귀어 사랑도 하였지만 그 모두가 그의 영혼에 안식처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글쓰기만이 유일한 위로였다고나 할까.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벽과 맞서 쓰러지지 않으려던 그의 몸부림은 글쓰기를 통해서만 생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전업작가 아니었던 시절, '아버지'로 대변되는 화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살아남고자 그는 퇴근해서 새벽 두시까지 매일 글을 썼다고 한다. 글만이 그의 가슴 안에서 터져나오는 울분을 감해줄 수 있었고, 자신과 닮은 주인공들이 세상과 대면하는 모습 속에서 그 어떤 연대감 같은 것을 느꼈을 터이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라기보다는 문학의 한 갈래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와 닮은 아들들은 이 세상에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굳이 아버지에게 옛날 일을 들먹이며 원망과 한탄을 토로하고자 하기보다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권력 관계가 성립될 수 있음을, 아무리 순수한 뜻을 지닌 선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상대에게는 악의 결과를 야기할 수 있음을, 그리고 순수를 가장한 그 이면에는 지배욕이라는 무서운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폐결핵의 아픈 몸으로 '아버지'로 대변되는 이 세상의 거대한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허라고 아름다운 복수를 감행한 것이리라. 제주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상인이었던 헤르만 카프카와 율리에 뢰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형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맏아들이 된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맏이로서의 역할을 의식하며 살았다.
아버지의 형상은 카프카의 존재뿐만 아니라 작품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으며, 사실 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유형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담긴 작품으로는, 「판결 Das Urteil」(1916),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Brief an den Vater」(1919) 등이다. 그 밖에 그가 남긴 작품은 「변신 Die Verwandlung」, 「소송 Der Prozess」(1925), 「성 Das Schloss」(1926) 등으로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소외와 부조리한 감정 등 실존의 양상을 몽환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