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달려온 가을은 이제 막 종착역에 이르렀다. 두툼하던 달력이 겨우 한 장의 여분 밖에는 남지 않은 지금, 차분한 심정으로 서서히 한해의 마감을 준비하는 것 또한 삶의 지혜일 듯 싶다. 

 미처 가을의 아름다움을 음미하지 못한 이라면 바쁘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조금만 짬을 내 만추의 산사를 찾아보자. 정갈하고 단아한 산사에서 잠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지쳐있던 심신이 다시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천왕사

 제주시 노형로터리를 거쳐 도깨비도로로 유명한 1100도로를 따라 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천왕사 입구라는 표지판과 맞닥뜨리게 된다. 한라산국립공원 구구곡 계곡에 위치한 천왕사는 주위의 기암괴석과 단풍으로 가을이면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유명해 불자들 이외에도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은 편이다.

 천왕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기암괴석들 위로 붉게 피어오른 단풍들은 스님의 은은한 목탁소리와 어우러져 찾는 이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듬뿍 선사한다. 겨울을 재촉하는 듯한 쌀쌀한 바람이 불 때마다 우주의 커다란 법칙 하나를 채우며 떨어져 내리는 낙엽도 제법 근사하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대웅전 한편에 소중하게 놓여 있는 기와장마다에는 이곳을 찾은 전국 각지의 불자들의 작고 소박한 소망들이 적혀져 있다. 계곡 깊은 곳에서 발원한 약수의 맛도 일품이다.

 아내와 함께 관광차 천왕사에 들렸다는 이영민씨(42·전라도 광주)는 “가을단풍이 볼만하다는 얘기를 듣고 불공도 드릴 겸 이곳에 오게 됐다”며 “직접 와서 보니 듣던 것보다 단풍이 훨씬 아름다워 안보고 갔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진입로에서 대웅전 앞까지 도로포장 중이라 포크레인 등의 굉음소리 때문에 산사 특유의 고요함은 덜 하지만 공사가 끝나는 11월 말이면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된다.

◈불탑사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 기슭에 위치한 불탑사가 처음 세워진 것은 고려 충렬왕 26년인 1300년이다. 조선시대의 배불정책으로 숙종 28년(1702년)에 크게 훼손되었지만 석탑만은 용케 화를 피해 원래 모습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1914년 안봉려관 스님이 사찰을 중건하면서 원당사에서 지금의 불탑사로 개명하지만 4·3사건 때 다시 폐허가 된 것을 1953년 이경호 스님이 재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불탑사는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절이지만 말끔하게 단장된 사찰 내에 들어서면 단아하고 정갈한 기운을 금새 느낄 수 있다. 절 한 켠에 세월의 더께를 쓴 채 매달려 있는 범종은 지금이라도 당장 자신의 목소리를 가을하늘로 들려줄 듯 자태롭다.

◈약천사

 산사가 주는 웅장함을 맛보고 싶다면 서귀포시 대포동에 있는 약천사를 빼놓을 수 없다. 문헌 등의 역사적 기록이 없어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의 배불정책 이후 수백년 동안 폐허로 방치된 것을 한 스님의 각고의 노력 끝에 동양최대의 사찰 중의 하나로 변모했다.

 야자수로 주위가 둘러 싸여 있어 다른 절과는 사뭇 다른,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사찰 정면에서 보이는 드넓은 가을바다는 보는 이의 마음을 탁 트이게 하고도 남는다. 화엄사의 각황전과 금산사의 미륵전을 역학 계산하여 설계했다는 대적광전을 비롯, 중생들에게 복덕과 지혜를 주고 소원을 성취케 한다는 오백나한을 모신 나한전 등의 볼거리도 많다.

 신혼여행차 제주에 왔다가 약천사에 들렸다는 김민정씨(28·경기도 파주)는 “독실한 불교신자라 전국에 있는 유명한 절을 많이 다닌 편이었지만 제주의 절은 처음”이라며 “자그마한 제주에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절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존자암지

 서귀포시 하원동 해발 1200m 볼레오름 기슭에 자리한 존자암지는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기록이 남아있으며 특히 「대장경」 ‘법주기’에는 “석가모니의 16존자 중 여섯 번째인 발라타 존자가 탐몰라주에서 불도를 전파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존자암지 세존사리탑은 제주도 유일의 장구형 사리탑으로 유명하다.

 존자암지에 가기 위해서는 영실주차장에서 내려 산길을 20∼3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만추에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 때문에 조금은 쓸쓸한 분위기가 풍기지만 오히려 그것이 존자암지의 매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글=김윤권·사진=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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