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미의 청소년 인문학콘서트 28 우르스 비트머 「어머니의 연인」 , 「아버지의 책」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내면이 황폐해가는 가족사 내밀하게 묘사

가족이라고 해서 저절로 이해와 소통이 되고,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건 아니다. 가족도 진정한 의미의 정신적, 정서적 공동체를 이루고 싶다면 많은 대화와 경험의 확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개인을 경쟁의 구도로 몰아넣으면서 정신적 여유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가고 있다.
그러면서 행복한 가족을 만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끊임없이 주입하는 모순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스위스 최고의 작가 우르스 비트머의 자전적 소설 어머니의 연인 , 아버지의 책 을 한꺼번에 내리 다 읽었다. 유명 작가의 가족은 어떠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나이 예순이 넘어서야 부모로부터 받은 고통을 편안하게 얘기할 수있었다는 작가의 말이 흥미를 자극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연인 , 아버지의 책 에서 작가는 아버지 아닌 다른 남자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어머니와 책과 작품 활동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던 이상주의자인 아버지의 일생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서 담담하게 재구성해낸다.
오늘 내 어머니의 연인이 죽었다 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연인은 평생 아버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어머니는 에트빈이라는 가난한 청년을 사랑하고 헌신한다. 하지만 에트빈은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고 만다.
에트빈이 결혼하고 한달 후 어머니도아버지를 만나 결혼한다.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여느 주부처럼 사랑 많고 온순하고 가정적인 현모양처인 듯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해결되지 않은 옛사랑이 괴물처럼 꿈틀댔다.
아이를 낳았다. 기뻐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기쁜 감정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남편과의 사랑도 처음에는 열정적인 듯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우울이 그녀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일부러라도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계속되는 것은 살갗에 박힌 에트빈에 대한 환상이며, 죽음에 대한 몽상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있는 대로 다떠올린 후 그것을 반복하곤 했다. 물론아이도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멀쩡한 반미치광이처럼. 그 사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한 가족이 같이 살면서도 말이다. 결국 어머니가 여든한살이 된 해, 그녀는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자발적 죽음이었다.
그럼, 아버지는 어떠했을까. 아버지는 평범한 남자였다. 하지만 아버지의가족에게는 아주 의미있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관 하나를 선물로 받는다는 것이며 백서 한권을 평생 채워야 한다는 의무이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작가의 아버지도 백서 한권을 선물로 받고, 받은 그날부터 매일 그곳에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기 전에는 아무도 그 백서를 볼 수 없다. 그야말로 평생 비밀 자서전 한 권을 완성하고 죽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버지는 꽤 성실히 백서를 완성해 나갔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부터 상처 받은 이야기까지. 어머니와의 결혼은 우연을 인연이라 의미부여 하면서 꽤 행복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이상적인 욕망이 많은 남자였다. 한때는 공산주의자였고, 당시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만나서 음악과 미술, 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했다. 교사가 된 후 학생들에게 그림책을 가지고 마음껏 상상하기 수업을 했다가 공산주의적 이념을 주입하려고 했다면서 해고통지를 받기도 했다. 술을 늦게까지 마시는 날도 꽤 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투었다. 돈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교사를 하면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집세 정도 낼 수 있는 벌이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현실에 맞지 않은 소비를 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소비 품목은 주로 책과 앨범, 술, 꽃다발, 장난감 사기 등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현실감 없는 남자라 생각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죽는 날도 작가와 어머니는 오늘은 나가지 말라 고 부탁하는 아버지의 말을 거절하고 공연을 보러 나갔다
.
그렇게 아버지는 죽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버지가 남긴 백서를 통해 작가
가 확인한 사실이다.
한 작가의 자서전적 가족사를 소설로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이런 가족사가 자신에게 알지 못하는 상처가 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최선을 다해 산 사람이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착한 여자였다.
그런데 왜 작가는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두 남녀는 가족을 이루고 살았지만 진실로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숨겨진 사랑을 알지 못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로는늘 빗나갔다.
어머니는 순수와 교양으로 화장을 한 채 우울과 몽상으로 평생을 스스로 괴롭혔고, 아버지는 대책 없는 낙관성과 과도한 이상에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늘 비난과 몰이해에 시달려야 했다. 그 사이에서 아들인 우르스 비트머는 진득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고 늘방황과 우울감에 시달렸다고 한다.하지만 그 정서 위에 유머와 위트가 흘러넘치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됐다는 것은 아버지의 대책 없는 긍정성도 물려받은 것 같다. 또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최고의 선물, 그것은 책과 음악앨범, 그리고 사람이었다. 어머니도, 작가도 모르는 많은 예술인들이 장례식에참석했다. 장례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축제 같았다.
작가는 예순이 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한 개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 때는 당연히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원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늘 곁에 있는 사람이고, 아버지는 늘 밖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숙한 인간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은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한국사회의 정서로는 가족 구성원을 한 개인으로 바라보는 일은 아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자를 타자로 인식할 때 존중감이 생긴다. 가족은 소유물도 아니며 내 안위를 위해 희생돼야 하는 노예도 아니다. 희생을 강요하는 건 일종의 폭력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 할지라도 한 개인으로서 존중하고, 함께하려고 할 때 가족은 사랑과 꿈의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면 굳이 어버이날이기 때문에 챙겨야한다는 부담감 또는 의무감 같은 것도 사라질 것이다. 어버이날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으며, 언제든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가족이 돼야 하지 않을까.
제주대학교 평생
작품 속 책갈피 |
| 아버지는 타자기를 한 대 가지고 있었는데, 오른손 검지 하나만을 이용하여 굉장히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쳤다. 그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펜대와 수정액을 손에 들고 검은 가죽책에 무언가를 썼다. 여행 중이든 새벽까지 계속된 파티가 끝나고 난 후이든 마찬가지였다. 그책은 2절판 크기로 원래는 빈 노트였는데 그동안 그의 글로 거의다 채워졌다. 그는 50년 전부터 이 책에 글을 써왔다. 그 일은 일종의 사명과도 같았다. (중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