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있다.

 골목골목을 돌며 온기가 남아있는 신문을 돌리는 청년, 트럭에 쌓인 야채를 내리며 새벽장을 기다리는 맞주름 잡힌 좌판장수, 하얀 아침을 전달하는 우유배달부. 새벽 4시 제주시내를 나가면 만날 수 있는 얼굴들이다.

 세상에 빛이라곤 가로등만 남는 새벽, 사라봉에 오른다면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하루평균 1500명. 지난 한해만도 59만명이나 찾았다는 사라봉 공원, 그 하루 속을 들여다봤다.

◈아침을 깨우리로다
 사라봉(紗羅峰) 정상에 위치한 팔각정인 망향정(望鄕亭). 매일 새벽 한판의 "난장"이 시작되는 곳이다. 걷기만 해도 입김이 뿜어 나오는 새벽 4시20분. 삼백 몇 개의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이 들었을 법한데 즐거운 몸짓으로 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망향정을 기둥 삼아 매일 4시20분부터 음악에 맞춰 뛴다. 공업용 면장갑을 낀 아줌마의 가벼운 손놀림에서부터 어설퍼지긴 했지만 빨간 체육복을 입고 왕년의 한가락 자태를 뽐내는 중년 신사의 몸놀림도 찾을 수 있다. 그러다 자연스레 무리를 지은 세 개의 원이 생겨난다.

 한 시간 가량 이어지는 대열에 참여한 사람은 줄잡아 70∼80여명. 70년대 유행했던 디스코 풍의 빠른 리듬이 주류를 이룬다. 자생단체인 "사라봉 동우회"가 준비해 온 음악들이다. 최근에는 단단한 시멘트 바닥도 우레탄으로 교체돼 운동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비가와도 빠질 수가 없다"는 남기견씨(54·제주시 용담2동)는 "이곳에서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내려가는 것만큼 즐거움이 없다"고 말했다.

 가로등 불빛만이 여전한 새벽 5시20분. 정상주변에만 200명을 넘는 인파가 몰려든다. 이것도 감귤 수확철이라 다소 줄어든 숫자란다.

 중간 중간에 자리잡은 각종 운동기구를 벗삼아 새벽을 즐기는 사람까지 포함하며 사라봉은 매일아침에만 500여명의 운동객들에게 점령당하고 있다.

◈멀리 보며 즐겁게
 한창 점심시간일 12시 30분. 예상과는 달리 우당 도서관에서 사라봉 공원을 오가는 발길들은 적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게 하는 기온이었지만 비질거리는 땀을 훔쳐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량 통행금지 판이 설치된 우당도서관 삼거리에서 만난 이복실씨(42·여 제주시 건입동)는 "바다를 보면서 산책할 수 있어 마음이 탁 트이게 된다"고 말했다. 인천에서 제주로 이사 온 지 열흘째라는 김석암씨(75 ·제주시 건입동)는 "공기도 좋고 산책로가 은은하게 펼쳐져 있어 인상적"이라면서 부인의 손을 꼭 잡고 산책로를 빠져 나왔다.

 그렇다고 사라봉 공원이 산책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각종 체육시설물, 궁도장인 한라정, 배드민턴장 등도 있다. 게다가 수영장, 체육관, 조깅장 등을 갖춘 제주시 국민체육센터도 개관을 앞두고 있다.

 사라봉 공원을 찾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말굽형에 높이가 148.2m 밖에 되지 않지만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 끝을 찾을 수 없는 바다의 장관이 펼쳐진다. 등을 돌리면 제주시내를 발아래 두게 된다. 

 제주도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된 봉수대도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산허리 순환도로에는 사라사(紗羅寺)가 바다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1917년 들어선 제주도 최초의 유인등대라는 "산지등대"도 사라봉의 명물 중 하나다. 남쪽기슭에는 모충사·의병항쟁 기념탑·만덕묘비가, 서쪽 기슭에는 충혼각이 있다. 일제시대 일본군이 파놓은 굴과 4·3 당시 학살의 증언도 오름 곳곳에 간직되어 있다. 유심한 산책객들에겐 또 다른 즐거움이다.

◈오후 5시 17분
 오후 5시 17분. 칠머리 당굿을 지내는 갈림길에서 정수장을 지나 산허리를 끼고 별도봉 정상으로 가는 길 대신 바다쪽으로 향한 산책로를 택했다.

 순례자들처럼 사라봉과 별도봉(別刀峰)을 휘감은 "장수산책로"에는 행렬이 이어졌다. 별도봉 북측사면 등성이가 바다를 향해 뻗어난 "자살바위"를 두고 바다를 품어내는 발걸음은 끝이 없다.

 타이어 매트로 깔아 놓은 바닥을 압박해가며 해안절경과 억새 밭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새 오현고 뒷마당에 도착하게 된다.

 수건으로 얼굴 가리개를 만들어 빨래집게로 조여 놓고 걷는 40대 아줌마들, 하얀 입김을 날리며 반바지를 입고 뛰는 50대 아저씨, 도서관에 나와 잠시 산책로를 타게됐다는 서른살의 취업 삼수생 등…. 40분 남짓 동안 1.8km "산책로"에서 만날 수 있는 얼굴들이다.

 관광객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해지는 광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연신 당부하는 김봉현씨(49 ·경기도 수원)는 "입소문만 듣고 가족과 함께 찾았는데 전국에서도 몇 안 되는 산책길"이라고 감탄했다. 사봉낙조(沙峰落照)를 체험해 보겠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았다. 특히 산책로 곳곳에 19개의 가로등을 달려있어 밤을 잊은 연인들의 모습도 목격된다.

 3만2000여명이 생활하는 건입동과 화북동을 품은 사라봉 공원. 이제 "자살터", "탈선의 현장", "아베크족들의 천국"이라는 과거의 오명과는 결별하고 있는 중이다. 대신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에게 건강이라는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글=강호진 기자·사진=부현일 기자>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