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기획 '제주잠녀' 6부 41. 보소 반도 '마지막'제주해녀 2

'제주잠녀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대신 정작 현직 잠녀의 수는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제주 밖 사정은 더하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중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1월 겨울 바람 속으로 물질을 마친 평대 잠녀가 귀가를 서두르고 있다. 촬영=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이경택

결혼 등으로 일본 건너간 뒤 현지서 물질 배워
2명 이상 작업, 도구 제작, '민속 지식' 등 계승
일본 조합법 강화.생업 기능 상실…기반 흔들려

"이제 여기서 물질할 수 있는 제주 사람은 우리 뿐이야"

와다우라에는 아직 3명의 제주 출신 현직 해녀가 남아있다. 좌해월 할머니(70), 김연희씨(51), 김정렬씨(49)다. 이들에게 '다음'은 없다.

'시어머니'를 잇다

좌해월 할머니는 시어머니(김해랑)으로부터 물질을 배웠다. 이들 고부의 사연은 김영.양징자의 <바다를 건넌 조선의 해녀들>(2004)에도 나온다. 책에 실린 인터뷰는 1983년 진행됐다. 책에서는 '41세'의 한창 때였지만 이후 30년이 더 지났다. 일본과 우리가 나이를 세는 방법이 다르다 보니 한 두 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같은 사람이다.

좌 할머니는 1978년 재혼을 하며 일본에 건너왔다. 협재 출신인 시어머니 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물질 밖에 없었다. 책에는 당시 좌 할머니가 살던 호타에서 '세 명'까지는 잠수 일을 해도 좋다는 불문율에 있어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좌 할머니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좌 할머니는 "'큰 며느리'여서 바다에 나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주의 관습 그대로다.

한림 월령 출신 김연희 해녀는 1989년 3월 결혼을 하며 일본에 건너왔다. 처음 바다에 나갔을 할 때만 해도 지역에 10명 정도가 작업을 한 것으로 기억했다. 물질은 시어머니(김태진. 81세 작고)로부터 배웠다. 애월 출신인 김정렬 해녀(49) 역시 일본에서 물질을 시작했다. 늦게 시작했지만 제법 실력이 좋은 편이다. 남편과 해녀민박을 운영한다.
 

일본 와다우라에 남은 마지막 제주 출신 현직 해녀. 왼쪽부터 좌해월·김연희·김정렬씨.

자연 친화적 진화

TV에서 낯선 말소리가 나오는 것만 제외하고는 보통의 제주 바닷가 마을과 비슷한 모습이다. 일기예보에 몰두해 물때를 살피고 '눈에 보여 그냥 두고 오지 못했다'며 한 망사리는 됨직한 톳을 꺼내다 된장에 무쳐 저녁상에 올린다.

좌 할머니는 자신의 시어머니와 홍석랑 할머니 등 먼저 미나미보소에서 물질을 했던 제주잠녀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두 잠녀를 챙기고 있다.

탐포(테왁) 만드는 일은 아직도 좌 할머니를 통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그것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같은 미나미보소 지역이지만 파도가 거친 와다우라에서는 나무로 만든 일본식 탐포를 사용하지 않으면 파도에 휩쓸리기 일쑤였다. 가나야, 다케오카에서는 스티로폼을 연결해 천과 망으로 싸서 사용했다. 호타 지역에서는 고무로 만든 타이어 모양의 부표에 천을 덧씌우고 중앙의 고리 부분에 끼워 사용했다. 천을 덧씌우는 것은 성게 가시에 뚫려 구멍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40·50대 잠녀들은 "이 언니가 없으면 물에도 못 가고 테왁도 못 만든다"고 했다.

'죽을때까지'…다음 없어

바다를 건넜지만 '잠녀' 특유의 문화 계승은 이어졌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이국에서 '바다'를 끼고 산다는 것은 제주 여성의 숙명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꼭 둘 이상 짝을 이뤄 작업에 나가고 수경 렌즈에 김 서림을 막기 위해 쑥으로 문지르는 것도 '어머니'와 '언니' '오바상(삼촌)'에게 배웠다. 

'머정 좋다'는 말에 웃을 줄도 안다. 멀리 후지산이 보이면 2~3일 작업을 중단한다. "모르지. 예전부터 그랬어. 눈에 후지산이 들어오면 '오바상'들이 일을 못한다고 화를 내. 왜 그런가 보면 꼭 2~3일 지나서 파도 때문에 바다에 못 들어가" 민속지식이다. 자기들 끼리 부르는 바다 이름도 있다. 

일본에서의 물질이 생각처럼 녹록한 것은 아니다. 자원 고갈이며 지역 어업인과의 마찰로 갈수록 제약이 많아졌다. 소라는 8월부터 9월 15일까지 작업을 하고 전복은 7월 10~30일 20일 동안만 잡는다. 그마저도 5년 전부터 조합원이 아니면 할 수 없도록 막기 시작했다. 금채기 외에 작업을 할 경우 처벌 수위도 높아졌다. 좌 할머니도 지난해 누군가의 신고로 꽤 큰 벌금을 냈다. "평생을 이것으로 먹고 살았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수십번 항의를 해서 겨우 '죽을 때까지'라는 약속을 받았다.

"우리가 '마지막'이야" 무심하게 툭 던진 한마디가 귓가에서 영 사라지지 않는다.

삶 통해 형성된 공통감각 가치 부여

2년에 걸친 해녀목록 작업 통해 '공동체성'부각
어업유산 1호…국가대표브랜드 가치 확장 과제

제민일보는 지난 2005년 시작한 대하기획 '제주잠녀'의 6번째 시리즈로 제주잠녀.잠녀문화의 세계화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를 위한 '해녀문화목록' 작업을 진행했다. 

처음 ①해양 생태와 어로 패턴 ②공동체의 자원관리와 사회적 역할 ③공동체 특유의 전승 문화 ④신앙과 의례 등 크게 4개로 분류해 시작됐던 작업은 이후 '공동체성'이라는 문화적 특성으로 이어졌다. 

또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 바다를 건넌 잠녀들의 삶과 현지에 뿌리 내린 문화, 그들을 하나의 문화로 연결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몇 번을 강조했지만 '유네스코 등재'는 유산적 가치를 인정하는 외에도 앞으로 이를 어떻게 콘텐츠화하고 전승.보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숙제를 던지는 일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후 제주잠녀 관련 유.무형 문화재 지정현황은 중요무형문화재 1건과 제주도 지정무형문화재 1건, 제주도 지정 민속자료 지정 15건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제주잠녀·잠녀문화는 지난 2012년 우리나라 무형유산 국가목록 등재로 유네스코 신정 조건을  만들었고 2013년 12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무형문화재분과위원회로부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 대상 신청 종목으로 선정됐다. 지난해 국가중요어업유산 1호로 선정되는 등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지만 내부 평가는 아직이다.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해녀 축제 등이 열리고 있지만 '제주해녀축제'는 아직까지 '지역 대표'라는 명함을 달지 못했다. 애써 헌정 받은 '해녀 노래'가 음원 관리 등 허술하게 처리되며 활용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내부 논의가 더디게 진행되는 동안 일본 미에현과 이시카와현에서 아마를 '현지정문화재'지정 활용하는 등 문화적 인정을 서두르고 있다.

생애사 등으로 정리한 '집합 기억'만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제주잠녀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4·3, 6·25전쟁 등 사회 혼란, 급속한 도시화 등 변화 속에서 묵묵히 섬 지켜온 존재였다. '바다'라는 생업 공간을 개척했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술·민속 지식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그들이 지닌 특유의 여성 리더십은 '삶 통해 형성' 된 공통감각, 정체성으로 정리된다. 국가 브랜드 등 '지속가능'을 전제로 한 가치 확장은 앞으로의 과제다. 이번 '해녀목록'작업이 남긴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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