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군인들이 제주 여성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그것도 육·해·공군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여성해병인데다 전쟁터에 투입하기 위한 ‘살상용 병력’으로 훈련도 받았다는 사실은 고개를 저을 정도로 신기할 뿐이다.

 여자 해병이 나오게 된 이유는 전시(戰時)라는 특성도 있지만, 6·25 남침당시엔 모병이 가능한 지역이 부산과 제주밖에 없었기 때문. 3000명의 모병인원을 채우지 못한 제주는 부득이 여자해병을 뽑게 된 것이다.

 여자특별중대라는 이름으로 제주 부둣가에 모인 15∼16세의 여중생 126명들은 훈련소로 떠나던 날인 1950년 8월 30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 ‘부모님이 공산당에 끌려가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해서’ 입대를 자원했던 21살의 선생님 강소삼씨(72·이도1동)는 그날 부둣가에서 허리까지 내려온 긴 생머리를 짧은 단발로 잘랐다.

 훈련소에 도착하자마자 포복훈련과 수기신호·전투교육, 전술 행군이 이어졌다. 사진은 여자해병들이 교육 중 쉬는 시간에 짬을 내어 찍은 것이다.

 미국인들이 입었던 군복을 손으로 잡고 큰 농구화를 발에 맞추기 위해 끈으로 묶어 훈련을 받은 것도 모자라 교육을 맡았던 간호장교의 입에선 매일 욕설과 연대기합이 떨어졌다. 김애순씨(69·화북동)는 “힘도 없는 여자애들이 무거운 총을 들고 뛰지 못하고 있으면 간호장교가 ‘제주도 똥돼지년들이 꽁보리밥만 먹다 쌀밥 먹으니 말을 안 듣는다’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회상했다. 고생스런 훈련과 밤이 되면 고향 생각에 서러워 몰래 숨어 울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들과 달리 6일만에 곧바로 전투에 투입된 남자동기들이 하나둘씩 죽어서 돌아올 때면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한 유골상자를 보면서 비장함에 눈물마저 메말랐다.

 목숨을 담보한 그때 교육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 탈환으로 41일만에 막을 내렸다. 나이 어린 여성들은 전역시키고 대학 나온 여성들은 장교가 되거나 학력·경력에 따라 진급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들은 봉사활동과 교직생활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전시에 이뤄졌던 41일간의 해병훈련은 그들에게 짧았지만 인생의 지도를 바꿀 만큼 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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