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미국 시카고 공항에서는 푸른 눈의 젊은 엄마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튜어디스의 손을 놓칠세라 꼬옥 잡고 들어오는 상고머리의 세 살배기 아기 김관희. 고무신과 멜빵바지의 그 아기는 바로 자신의 아들이 되려고 이역만리 한국에서 온 입양아들이었다. 엄마 대신 ‘마미’라고 부르기 시작한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상고머리 아들은 미국에 남았지만 엄마는 아들의 나라 한국으로 날아왔다. 대양을 건너 지난 3월 서귀포에 짐을 내린 조 브라운씨(59)는 25년 전 관희처럼 한국인들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상고머리의 천사’ 내 아들 콴
 조 브라운이 해외 입양을 결정한 것은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였다. “푸른 눈을 가진 아이를 입양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죠. 다른 외국아이들도 마찬가지였구요. 유일한 희망은 한국이었어요”

 홀트아동복지회가 보내준 사진 속 관희는 동양 아이를 실제로 본 적이 없던 그에게 말 그대로 천사였다. 통통하게 오른 두 볼은 마치 자기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고, 리플이 달린 여자아이 바지를 수줍게 입고 있었다. ‘그래 이 아이야’ 조 브라운은 곧바로 입양답장 서신을 보냈다.

 관희는 홀트아동복지회 앞에서 버려진 채 발견됐다. 기계충 먹은 이마와 영양실조에 걸려있던 관희의 그때 나이는 겨우 한 살.

 모든 입양 부모가 그렇듯 자신의 아이는 미국 아이로 커가길 바라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조 브라운은 아들에게 ‘콴’이라는 한국인 이름을 그대로 남겨줬다. ‘콴 김 브라운’(Kwan Kim Brown). 그것은 관희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켜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완벽한 세상은 없다
 테네시 주 작은 마을에서 콴은 늘 혼자였다. 유일한 동양 아이였다. 작은 체구에 짝 찢어진 눈은 학교 친구들로부터 늘 놀림감이 됐다. 생소한 모습의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야 했던 이질감도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었다.

 아이들과 툭하면 싸움질을 하고 들어오는 콴을 그는 나무라지 않았다. 상처받을 이유를, 상처받지 않을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10살 남짓 됐던가. 아들이 하루는 울면서 말했다. “왜 엄만 나를 버렸어요? 왜 내 눈은 남들처럼 생기지 않은 거예요?” 아이의 뻥 뚫려진 영혼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한국을 알게 하자. 조금이라도 그의 뿌리를 찾게 하자’

 그날로 아들과 함께 도서관을 찾은 그는 한국의 관광책과 역사책을 사들고 오면서 콴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 세상에 완벽한 세상은 없어.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아 질 수도 없고, 똑같아지려고 하지 말아라. 무엇을 잃었을까 항상 생각하면서 너 자신을 찾고 또 찾아라” 콴에게 그 말은 그를 지탱하는 인생의 큰 기둥이 됐다.

#모험 찾아 떠난 아들의 나라
 조 브라운이 한국 땅을 밟은 건 순전히 아들의 나라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1년 전 남편과 사별하면서 자신을 바꿀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에게 타고난 모험심과 독립심이 발동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원어민 영어교사’를 구한다는 한국일자리 정보를 본 그는 아들과의 긴 이별을 예감했다.

 한국에 살면서 아들의 생부모를 찾겠다는 생각은 당초에 없었다. 포기했다기보다 의미가 없었다. 제주에 정착한 후에도 그는 홀트아동복지회에 관희의 생부모로부터 연락이 왔는지 묻는 한 통의 편지를 보냈을 뿐이다. 그것보다는 아들의 나라 한국에 대해 알고 싶었다. 강한 아들로 자라준 관희의 본능에 대해, 내면 속에 자리잡은 영혼의 뿌리에 대해.

 조 브라운은 서귀포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책에서 보지 못한 또 다른 한국을 알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번 영어교육 봉사활동을 하는 제남보육원에서 그는 모진 역경에 강한 한국사람의 근성과 그곳에서 봉사하는 제주의 여성들을 보면서 콴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뿌리는 곧 나의 뿌리
 조 브라운씨와의 인터뷰가 있던 날, 아들 김관희씨는 어머니를 만나러 마침 서귀포에 와 있었다. 취재진의 행운이었다.

 “입양아들은 생부모들이 찾아도 대부분 자책감 때문인지 만나지 않겠다고 말을 한답디다. 그것이 그들에겐 입양보다 큰 상처가 돼요. 그들은 그저 얼굴을 보고 싶을 뿐인데…” 조 브라운이 얘기하는 동안 서른살의 아들 김관희씨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제가 고아였든, 버림을 받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 삶의 뿌리를 확인한다는 게 중요하죠. 원망도, 후회도 없어요” 김씨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리움에 북받치는 모습이었다.

 아들과 함께 제주에 있으면서 브라운씨는 또 다른 놀라움을 느꼈다. 한국에 오면 자신처럼 외국인 취급을 받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마치 30여 년 동안 멈추었던 시계가 작동을 시작한 것처럼 아들은 쉽게 한국과 동화됐다. 한국음식에 빠르게 숟가락을 들이밀고, 한국인 여성에게 매력을 느꼈다.

 지난주에는 아들과 함께 제남보육원을 찾았다. 25년전 홀트아동복지회에서의 추억은 이제는 없었다. 쉬쉬하면서 데리고 오던 임시 보모들도 이젠 ‘우리 아기가 예쁘죠’하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조 브라운씨와 김씨가 영어공부를 가르치고 있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시종 싱글벙글 얼굴에 그늘이 없다.

 조 브라운씨는 콴을 받아들이면서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아들이 한국을 잊을 무렵 그는 한국을 기억해냈고, 지금 이곳에서 그의 또 다른 인생을 꾸리고 있다. 마치 잊혀진 자신의 뿌리를 이제서야 찾은 것처럼.

 보육원 아이들에게 ABC를 가르치는 콴의 모습을 보며 조 브라운씨는 부지런히 25년 전 콴의 모습을 찾는 듯 했다. “난 눈이 왜 이래?”하며 묻던 아들의 눈물을.<글=현순실·사진=조성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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