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미르. 미르가 세상에 나온 지 16개월에 지나지 않으나 햇수로는 3년째다. 그놈 참 기특하다. 해준 것도 없는데 3살이나 먹었으니….

 그런데 미르가 또 다른 세상에 나오게 됐다. 미르의 시시콜콜한 주변 얘기가 신문지상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해진다는 점이다. 그것도 엄마가 쓰는 육아일기가 아니라 아빠의 육아일기라는 표현을 빌려. 게다가 기자의 이름을 걸고 쓰는 칼럼이어서 뭇 남성들의 표적 아닌 표적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육아일기는 미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됐다. 그 작업의 일부분을 담아 미르와 마누라(조선사회경제사를 쓴 백남운은 ‘마주 눕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마누라를 표현했다. 남자와 동등한 의미의 뜻이 담겨 있어서 마누라라는 이름을 쓴다)에게 선물하려고 책으로 펴기도 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다. 그 책을 받아든 주변 사람들로부터 ‘대단하다’는 평과 함께 ‘마누라에게 보여줘서는 안되겠다’는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육아일기를 쓴다는 자체에 있다. 육아일기를 아빠가 쓰든 엄마가 쓰든 상관은 없다. 육아일기는 자신의 아기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며, 부모의 참사랑은 이런 것이었다는 점을 육필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순의 박정희 할머니는 50년 간 곰삭은 육아일기를 지난해 세상에 내놓았으며 틈틈이 신세대 부모들을 대상으로 육아일기 강좌를 열기도 한다. 팔순의 할머니도 육아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데 젊은 우리 세대들도 생각을 달리해 보자. 곤히 잠자는 아기를 바라보며 펜을 잡아보면 어떨까. 아빠라면 더욱 좋을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기와의 친밀감이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내가 마누라와 함께 미르를 데리고 어디론가 이동을 할 때면 늘 자동차의 뒷좌석을 차지한다. 운전대는 마누라가 잡고, 난 미르를 안고 뒷좌석을 지킨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무언의 약속을 해버렸다. 마누라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기의 안전을 지키려는 것이며 그것은 아기에 대한 예의”라고.

 뒷좌석을 지키는 건 또한 새로운 묘미를 가져다준다. 남자들이 아기를 품안에 안아볼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미르도 뱃속에서 엄마랑만 지내왔고, 평상시도 엄마와의 접촉시간이 대부분이다. 미르와의 교감을 위해 시작했던 일이 육아일기였으며 자동차 뒷좌석에서 미르를 품안에 안는 일은 그것의 연장선에 있다. 뒷좌석을 지키는 남자, 아빠의 육아일기가 이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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