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공동체를 엿보다 2. 불턱 공동체 Ⅰ

정년 없는 '물질'…잠수회 내부 규약 중심 문화
고령화·수산업내 비중 확대 등 '해녀양성' 한계
공동체 산실 등 사회문화적 의미부여 서둘러야 

"삼촌, 삼촌은 올해부터 바당에 나오지 맙서" 최근 한 어촌계 잠수회에서 89살 해녀 2명이 '현역을 은퇴'했다. 잠수회장의 결정이었다. 워낙 고령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전체 작업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너네가 경까지 말허는디…". 그렇게 해녀는 바다를 떠난다.

# 암묵적 '동의'를 쌓다

해녀의 정년을 묻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대체적으로 정년은 '만 65세'다. 해녀에게 이 기준을 가져다 대면 말 그대로 '큰 일'이 난다. 

2015년 말을 기준으로 한 제주해녀 수는 4377명. 이중 60세 이상이 전체 85%나 된다. 고용통계상 해녀가 개인농림어가, '나홀로'자영업자로 분류되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70대 이상이 2340명(53%)이나돼 해녀가 절반으로 줄 수밖에 없다. 

어촌계 가입 문턱을 낮추고, 젊은 해녀를 양성한다는 계획을 감안하더라도 이 대로라면 감당하기 힘든 가파른 감소세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해녀 수가 줄어드는 것은 4면이 바다인 제주 입장에서는 전체 어업 위축과도 연결된다. 도내 어업종사자 등 제주해녀 비중은 전체 84%(2014년 말 기준)나 된다. 1970년대에는 41% 정도였다. 해녀수가 계속해 줄어드는 상황이었지만 다른 분야와 달리 일정 규모를 지켜왔다. 2010년 이후 전체 70%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다.

그럴 수 있던 배경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불턱'으로 대표되는 공동체 문화에 있다. 해녀의 정년은 불턱이 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사례처럼 잠수회장이 고령 해녀에게 은퇴를 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녀 스스로 몸에 이상 등을 이유로 더 이상 바다에 나서는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해녀간 불미스런 일이 생겨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상군해녀 직권으로 작업에 참여하기 못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공동 작업인 때문에 이같은 결정은 오랜 세월을 통해 축적된 '동의'를 전제로 한다.

# 사라지는 것, 사라지게 하는 것

손해라 느껴지면 가족끼리도 송사를 제기하는 각박해진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불턱'을 알아야 한다.

문화재청이 올해 '해녀'의 무형문화재 지정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제주에서는 이미 1971년 해녀노래를 도지정문화재 1호로 등재했다. 다음 순서가 불턱과 해신당이었다. 해녀문화를 설명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추가 지정 필요 의견이 나올 때마다 원형 훼손 등의 이유로 성사되지 못했다.

지난 2013년 제주도와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가 공동으로 진행한 '해녀문화유산조사' 결과를 보면 당시 기준으로 남아있는 도내 불턱은 34곳에 그쳤다. 한 어촌계당 2~3곳, 많게는 5곳 이상 있었다던 해녀들의 기억에서 유추해볼 때 적어도 200곳 이상의 불턱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마저도 현재 이용 중인 불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관리상태가 미흡해 '소멸'은 시간문제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후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불턱 등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아직 커지지 않고 있다. 제주해녀문화는 2015년 국가어업유산 1호에 이어 지난해 우리나라의 19번째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대표목록으로 등재됐다. 

등재 내용에 '불턱'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잠수장비 없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문화 △제주도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해녀, 지역공동체의 정체성 형성 등의 부연 설명과 여성 주도 문화라는 점에서 불턱의 의미는 커진다.

# '전승' 의미를 되새겨야

힘든 바다 작업을 전후해 해녀들에게 '안식'의 의미를, 세대간 전승 공간으로 세월을 먹으며 자리를 지켰지만 '도시화·현대화'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해안도로 개발 등의 정비 과정에서 별다른 동의 없이 자취를 감췄다. 시대가 바뀌면서 돌 대신 시멘트 벽으로 바람을 막은 공간이 만들어졌고 다시 현대식 시설을 갖춘 '해녀탈의실'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불턱이 지닌 의미가 희석되는 일도 있었다.

이제는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으면 보존·관리가 어려운 상황이 됐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해녀들 사이에서는 '물엣 것은 친정어머니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공동체가 소유하는 바다 생산물은 마을 어장을 이용할 수 있는 해녀들이라면 대가없이 채취할 수 있는데다 그 혜택에 구분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게석'이란 해녀 용어 역시 불턱에서 만들어졌다. 옛날 작업에 서툰 똥군 해녀들을 응원하고 나이 많은 해녀들의 상실감을 채우는 '한 주먹'이다. 애써 채취한 물건을 몰래 그들의 망사리에 넣어주는 행동은 '공동체'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불턱은 이제 사회문화적 접근을 통해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해녀들은 이 불턱에서 정보 전달과 의사 소통은 물론 인간적인 질서와 상하 배려, 삶의 미덕을 배웠다. 해녀 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이런 장치가 사라지면서 인간성 상실이란 단어가 공공연해졌다. 지켜야 할 것은 이렇게 분명하다.

도립미술관 기획전 진행…예술적 감흥 자극

해녀미학(美學)이란 말이 있다. 제주와 인연을 맺은 문화예술인들에게 '해녀'는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살아있는 뮤즈였다.

과거 바깥 시선으로 본 제주해녀는 사실 편파적이다. 힘들고 고단하지 않으면, 원시적이다.

해녀에 대한 대표적인 글로는 북촌 김춘택의 '잠녀설(潛女說)'이 있다. 구한말 제주로 유배를 왔던 김윤식(1835~1922)도 「영도고(瀛島稿)」에 제주해녀를 노래했다. 

'가련하구나 전복 따는 여자(可憐採鰒女)/숨비소리 내며 깊은 물 헤엄치네(歌嘯游深淵)/상어처럼 사람이 잠수하니(恰似鮫人沒)/구름 같은 파도 실로 아득하구나(雲濤正渺然)'

정말 그럴까. 제주교육박물관이 추자도에서 입수한 자료 속에서 찾아낸 '잠수가 화답하는 노래 39절'을 보면 해녀들의 생각은 바깥과 달랐다.

"…나이 겨우 열 네댓 되고 나면/물속에서 뛰놀며 오리를 따라 멱 감는다오/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게 풍속이 되어/몸을 가벼이 여기고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오/머리를 묶고 홑옷 입는다 비웃지 마소/벗지도 않으며 팔다리로 헤엄치는 데도 꺼리는 게 있으니/위태로움에 들고 험난함을 밟는다고 말하지 마소 (…) 농사짓고 밥 지어 먹지 않아도 오히려 배부르니/곡식 씨 뿌리는 것보다 잠수의 수익이 낫다…"(오문복 「영주풍아(瀛州風雅)」 중)

마침 제주도립미술관 해녀문화 기획전이 한창이다. 3월22일까지 진행되는 '물때, 해녀의 시간'에는 해녀를 주제로 제작한 회화, 사진, 설치미술 작품 50점이 소개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제주해녀를 옮겨낸 화가는 꽤 된다. 조병덕 화백의 1948년 작인 해녀 그림은 불턱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흰 물소중이를 입은 해녀들이 등장한다. 장리석 화백은 해녀의 원시적 생명력과 건강미를 주목했다.

오승윤의 '해녀도'는 이국적인 해녀들이 나와 다소 낯설다. 혹자들이 말하듯 해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순간 감정에 충실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해녀와 그들의 문화를 안다면 화면은, 그리고 공간은 깊고 또 깊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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