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6. 사랑과 구원의 시(詩)를 그리는 영화

영화의 메시지 대신하고 있는 한 편의 시 영상화
인류·우주 전체에 대한 한없는 염원 강하게 표현

'사랑' 인간이 버리지 못하는 욕망

인간이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욕망이 있다면 생존과 불멸, 즉 사랑에의 욕망이 아닐까.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면 하는 것이다. 아니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도 사랑하고 사랑받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생존은 늘 위협당하고, 현실적으로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영혼만이라도 살아서 대대손손 불려졌으면 하는 바람은 버릴 수 없는 욕망이 됐다. 그것이 문화와 예술의 발달에 기여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수많은 동굴 벽화가 이를 증명해준다. 

라스코 동굴의 벽화에는 구석기인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부상 당한 들소, 그 옆에 사람의 형상, 또 그 옆에 막대 위의 새, 주변에 알 수 없는 기호들, 새 모양의 가면들. 아마 새를 토템으로 섬기는 씨족 집단의 의례의식을 그린 것이라 추정한다. 새는 인간의 영혼을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매개하는 존재로 상징화한 것이다. 

즉 천사 혹은 중개자로서 새는 인간의 소망을 하늘로 실어 날랐을 것이다. 안전한 사냥과 튼실한 육체를, 풍요로운 열매와 다산을, 죽은 자의 구원을 말이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가 약 1만5000년 내지 1만3000년 전이라 하니 인간의 욕망을 동굴 벽이라는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한 건 우리의 상상보다 퍽 오래된 이야기다. 그러한 캔버스가 확장되고 진화·발달해 움직이는 영상이 된 것이다. 

라스코 동굴에 그려진 새의 이야기를 인간과 천사의 이야기로 확장해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빔 밴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1987)다. 시적 대사와 시적 은유와 상징, 흑백의 조화로운 영상미, 사회·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의 조화를 꾀한 아름다운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관객모독', '소망 없는 불행'으로 유명한 페터 한트케의 시로 시작한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중략)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페터 한트케의 시 '유년의 노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라는 돌림 노래와 같은 이 시는 영화 내내 주요한 장면마다 흐른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은 천사와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천사가 설자리가 사라진다. 위의 시는 그러한 허망함과 절망감을 노래하고 있다. 시가 영화의 메시지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만이 이 세계를 구원한다

다미엘은 천사다. 인간의 오랜 역사를 관찰하는 천사인데, 어느 겨울날 베를린에 내려온다. 그는 인간의 삶에 간섭할 수는 없고 인간들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의 삶에 개입할 수는 없어도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넣을 수는 있다. 다미엘은 인간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인간의 삶에 참여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천사로서의 영원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갈등이 있다. 인간의 삶에 참여하고 싶은 소망이 너무 커진 다미엘은 결국 천사의 불멸성을 포기하기로 한다. 결국, 오갈데 없는 서커스단의 곡예사 마리온을 사랑하게 되고, 한 여인의 남자로 남게 된다. 천상의 영원보다 지상의 사랑을 택한 것이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사랑만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천사 다미엘은 분단독일의 상징인 거대한 장벽 첨탑 위에서 베를린 도시,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수영장이 있는 저택을 꿈꾸는 소녀, 의사한테 갈 돈이 없는 병든 여자, 같은 지붕 아래서도 단절된 늙은 부모와 젊은 아들, 파산한 후 자살을 꿈꾸는 지하철 속의 남자, 많은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힘겨운 가장, 이혼한 후 아들과 함께 살며 비로소 행복을 만끽하는 여인 등. 눈에 보이지 않음으로 자유롭게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비명과 탄식, 침묵과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천사 역시 인간을 향해 들리지 않는 독백을 들려주기도 한다. "아파봤으면 좋겠어" "손때가 묻게 신문을 읽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진정으로…" 진짜 살아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1986)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의 장엄함으로 시작한다. 오프닝 음악,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이 영화가 던져주는 인간의 기도다. 또한 생명의 나무를 심고 있는 주인공 알렉산더의 속사포 같은 대사, "옛날 한 수도원의 늙은 수도승이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산에 심었지. 그는 제자에게 그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매일같이 정성 들여 물을 주라고 말했단다. 제자는 매일 나무에게 물을 줬는데, 이듬해 나무에선 예쁜 꽃이 피어났고 그 나무는 다시 살아났다…" 실어증에 걸린 아들 고센에게 알렉산더는 끊임없이 말을 쏟아낸다.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인류의 구원은 어디에서 올까

영화 '희생'은 제3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는 긴급 뉴스로 사건을 이끌어간다. 알렉산더는 가족은 잃어도 인류는 멸망하게 할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을 가진 자이다. 그는 처음으로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세상을 평화롭게 되돌려 놓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또한 우체부 오토에게서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을 듣는다. 하녀 마리아와 동침하면 된다는. 참으로 황당한 구원의 메시지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면서 마리아에게 구애를 한다. 그의 진정성을 믿으며 마리아는 그를 받아들이고, 인류구원의 합궁의식은 성사된다. 그때 갑자기 천지를 뒤흔들던 폭음 소리가 가라앉고, 알렉산더는 조용히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다. 이때 히로시마를 연상케 하는 일본음악이 흐른다. 집은 순식간에 허물어져 내리고, 그는 자신의 기도에서 맹세한 것처럼 가족도 포기하고 벙어리가 되려 한다. 말이 인간을 멸망케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 고센은 죽은 나무에 물을 뿌려주며 아버지가 말해준 일본 수도승의 일화를 기억한다. 그리고 묻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게 뭐야 아빠?"라고. 벙어리가 돼야겠다고 하는 아버지와 비로소 말을 트게 된 아들, 참 아이러니다. 영화는 환상과 현실인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의 길을 묻는다. 인류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희생'은 알렉산더라는 말에 갇힌 인간(이성적 존재)을 통해 인간의 믿음에 대해 자문한다. 전쟁의 공포는 실어증을 낳는다. 하지만 전쟁은 인류역사 이래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도대체 전쟁은 왜 하는 것인가. 인간은 아직도 자기해명에 떳떳하지 못하다. 전쟁에 대한 정당한 해명 없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광기어린 알렉산더의 행동을 통해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의 닫힌 영혼에 불을 지르고 있다. 그에게 불은 희생과 구원의 기도다. 인류와 우주 전체에 대한 사랑에의 한없는 충동이다. 죽은 나무에게 물을 계속 주면 나무는 꽃을 피워낼까.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