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7.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 그리다

영화가 예술인 이유는 진실을 올곧게 비추기 때문
고통과 죽음, 사랑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 표현

사랑없이 세계는 공존할 수 있을까

지난 5월22일 영국 맨체스터, 미국의 팝가수 '아리아나 그란데'의 공연장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테러가 발생하자 아리아나 그란데는 테러 피해 유가족을 위한 자선공연을 열어 후원금 30만 달러(약 3억2000만원)을 모았다. 그런데 지난 6월3일 런던에서는 또 테러가 발생했다.

노래 공연과 테러 그리고 자선공연, 또 테러…. 마치 영화를 보듯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시·공간을 실시간 검색하며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시구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성복의 시 '그날'에 나오는 시구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전쟁과 테러, 살인, 감시와 통제로 인한 인권이 유린당하는 시대를 목도하면 예술 무용론이 종종 언급된다. 

얼마 전, CNN에서 공개한 시리아 내전에서 발생한 사린가스 공격으로 어린이를 포함 9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영상이 공개됐다. 7분42초짜리 이 영상은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뿐 아니라 입과 코에 거품을 잔뜩 물고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공격이 단행된 시각은 오전 7시쯤, 어린이들이 아직 잠 속에 빠져 있거나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건 영화가 아니라 실제 이야기다. 슬픔과 참혹을 넘어 절망적이다. 시리아 내전 사린가스 공격 영상은 SNS를 통해 전 세계에 퍼졌고,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도, 미국의 트럼프대통령도 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를 선언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적어도 그럴 수 있는 공감과 연민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현실에서는 전쟁과 테러, 살인, 감시와 통제로 인권이 유린 당하는 상황을 끊임없이 목도함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 아직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능력 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인간애의 능력을 확인시켜주고 또 이를 확장시키는데 꽤 많은 노력과 비용을 할애하고 있다. 

상처와 치유를 다루는 영화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 '중앙역'은 브라질의 수도 리오 데자네이로를 배경으로 한다. 산업화에 실패한 도시 리오 데자네이로의 중앙역은 출퇴근 시간이면 수많은 인파가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진다.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삶의 모습도 다양하고 온간 사연들로 넘쳐난다. 그 곳 중앙역에 노처녀 도라(페르난다 몬테네그로 분)가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편지를 대필해주며 살아가고 있다. 구구절절 사람들의 편지 사연은 애틋하고 절박하다. 

하지만 도라는 대필한 편지를 집으로 가지고 가서 친구와 돌려 읽기도 하고 더러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매정한 성격의 소유자다.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는 아나(소이아 리라 분)도 도라에게 편지 대필을 부탁한다. 그녀는 아들 조슈에(비니시우스 드 올리베이라)를 홀로 키우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아나는 편지를 부탁한 후 돌아가다가 중앙역 건널목에서 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만다.

한순간에 조슈에는 고아가 된다. 이를 지켜본 도라는 조슈에를 집으로 데려가서 하룻밤 재우고 입양기관에 맡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은 불법 장기 매매 업소였다. 사실을 안 도라는 조슈에를 몰래 빼돌리고, 함께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예기치 않은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는 도라가 조슈에와 그의 아버지를 찾아 떠난 여정에서 겪는 우여곡절과 화해의 과정을 보여준다. 버스에, 트럭에 몸을 싣고 중앙역에서 '세상 끝'(조슈에 아버지가 사는 곳) 마을에 이르기까지 조슈에와 도라는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몇 번이나 헤어질 위기를 맞기도 한다. 

하지만 도라는 조슈에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죽음을 회상한다. 자신이 지금과 같이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을 갖게 된 건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것 때문이 아닐까. 도라는 조슈에에게 아버지의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고 나서 새벽 첫차에 몸을 싣는다. 그 사이 도라는 조슈에에게 정이 많이 들어 함께 살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자신이 조슈에를 데리고 있는 것보다는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낫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 '중앙역'은 나이든 여자와 소년의 우정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2002)는 가족을 찾아 떠나는 로드무비라는 점에서 빔 밴더스의 '파리 텍사스'(1984)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어디 길 떠나는 영화가 이 둘 뿐이랴. 대부분의 영화는 삶이라는 길에서의 어두움과 밝음을 그린다. 즉, 머묾과 떠남, 그 과정에서의 상처와 치유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가 예술일 수 있는 이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상처와 길 떠남, 복수, 사랑,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의 스토리는 남편의 배신과 죽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씻기 위해 밀양으로 떠난 신애(전도연 분)가 겪는 또 다른 상처, 아들의 죽음과 둘러싼 기가 막힌 사연을 내용으로 한다. 아들 준(선정엽 분)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를 구원해준 건 사랑이었다. 마을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 분)의 질박한 사랑이 없었다면 신애는 견뎌낼 수 있었을까. 

영화는 제목에 모든 것을 다 품고 있다. '숨은 빛'을 뜻하는 밀양(숨을 密, 볕 陽, 숨은 빛). 죽을 것처럼 아픈 신애의 어두운 삶에 종찬이라는 사랑의 햇살이 비췄기에 그녀는 살아날 수 있었다. 영화의 엔딩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 장면이다. 머리를 자르는 신애 앞에 종찬이 거울을 들고 서 있다. 잘려진 머리카락은 마당의 음지쪽으로 날아가고, 햇살은 바람에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비춘다. 마당에는 빈 페트병, 쇠붙이, 호스 등이 흩어져 있다. 절반은 음, 절반은 양, 아름답다고도 추하다고도 할 수 없는 삶의 양 단면이 그 이미지에 다 배어 있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고통과 죽음, 사랑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내는 시적 눈을 가진 자여야 하지  않을까. 수전 손택의 말처럼 "지금 있는 곳, 자기 삶 속에 들어 있는 자신과 동시에 세계에 온전한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작가의 몫인 것이다. 영화가 예술일 수 있는 이유는 세계의 진실을 올곧게 비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전 손택이 지적한 것처럼 이미지화된 세계의 고통이 자칫 구경거리가 돼버려서는 안된다. 전쟁과 테러가 난무하다고 해서 깨고 부수고, 피를 튀기는 스펙터클하게 만들어진 이미지들로만 영화가 채워진다면 그것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기보다는 폭력에 대한 무감각만 키워줄 것이다. 

폭력의 내면화는 무분별한 이미지의 남발에 있다. 반대로 공감과 연민, 사랑의 내면화는 절반의 상처와 절반의 사랑이 서로를 감싸고 있는 소리 없는 이미지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진실한 이미지들로 잘 짜여진 영화 한편은 사랑에 상처 받고도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함부로 미워하지 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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