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9. 여성의 눈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

여성들의 현실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자유로운 인생 찾아 주체적 삶의 첫 발을 내딛다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한 거울

영화 혹은 영상 매체가 사회에 가하는 폭력성을 일례로 표현하자면 "여배우는 왜 다 예뻐야 하는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에는 근본적인 논리적 오류가 있다. '예쁘다'의 의미에 대해 동일한 표준을 도출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동의한다는 사실, 이 점은 아이러니하다. 전통영화에서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착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예쁜 여자는 좋다'는 공식을 만들어내면서 남성들에게 여성에 대한 비이성적 로망을 갖게 만들었다. 이것이 이미지 예술이 갖는 최악의 교육적 효과다. 전통영화에서만 그런가. 현대영화는 더욱 교묘하게 여성을 미화하면서 폭력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쁘고 지적이면서 자기 노출적이면서 도전적인…' 즉, 슈퍼우먼이 요즘 가장 뜨고 있는 여성상이다. 영화 '원더우먼'이 이를 대변해준다.   

영화는 이 사회의 거울이어야 한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이때 거울의 의미는 서사적 의미라기보다는 서정적 의미의 은유다. 선과 악이 공존하며, 전쟁과 평화, 질시와 반목, 화해와 상생, 미움과 증오, 사랑의 서사가 이 세계의 굵은 뼈대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영화와 같은 움직이는 영상 매체가 할 일은 서사구조의 굵은 뼈대 속으로 들어가 현미경의 눈으로 세계의 진실을 비춰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성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가운데 하나는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영화 '종이달'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 '종이달'은 주인공 리카를 통해 여성이 당하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이중구속의 문제를 다룬다.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뻔하다. 권선징악의 표본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이 여성이 이렇게까지 망가지고 만 것인가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한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 사회 시스템이 가하는 억압

영화는 한 여학생이 정성스럽게 돈을 편지봉투에 넣고 자신이 후원하고 있는 소년의 사진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뒤이어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부르는 복음성가가 평화롭게 울려 퍼진다. 

주인공 리카는 기혼이며, 은행의 계약직 사원이다. 그녀는 예쁜 미모와 상냥한 성격으로 고객들의 신임을 얻으면서 무료했던 생활의 활기를 얻는다. 어느 날 퇴근길에 리카는 백화점에 들러 생각에 없던 화장품을 구매하게 된다. 판매원의 상술에 넘어간 것이다. 이때 돈이 부족하자 고객의 예금에서 1만엔을 꺼내 충당한다. 이로부터 생긴 일상의 균열은 짜릿한 스릴과 함께 거센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그녀의 삶은 횡령과 불륜 등을 일삼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일탈의 끝을 보게 된다. 횡령을 왜 했느냐는 동료 직원의 질문에, 리카는 이렇게 대답한다. "가짜였으니까요"라고. 

앞서 언급했지만 리카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사회의 희생양이다. 그녀는 미모와 상냥한 성격 때문에 고객들의 신임을 얻는다. 만약에 그 반대라면 어떻게 됐을까. 은행 여직원은 우선 미모가 중요하다. 그리고 성격도 온순하며 상냥해야 한다. 돈 많은 고객들은 그런 여직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이미지 메이킹 교육은 그래서 있는 것이다. 

리카는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모든 걸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일은 혼자 도맡아해야 했고, 남편의 은근한 무시도 참아야만 했다. 직장에서도 직장 상사, 돈 많은 노인의 성희롱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생존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비정규직 사원이다. 정규직이 아니라는 것은 언제든 쫓겨날 신세라는 것이다. 그러니 죽을 만큼 버티는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경제력이 없다는 건 치명적이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카는 자신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최대한 숨죽이며 살아보려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억압한 결과는 과도한 분노 폭발과 일탈 행위였다. 

현대 사회의 시스템이 개인에게 가하는 억압은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든다.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그렇다. 정치·경제·문화 권력은 남성들이 쥐고 있다. 그들만의 연대는 너무도 단단해 여성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는 것은 고군분투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미모, 지성, 성적 매력, 성격 등에서 특정 가치의 일색을 요구한다. 즉 본성대로 살면 살아날 재간이 없다.

낭만은 오히려 은유로서의 질병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돼지책」은 피곳씨 가족의 이야기다. 그림책 속 엄마의 표정은 책의 마무리에 다다를 때까지 얼굴이 측면으로만 비춰진다.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일을 하느라 얼굴이 카메라의 시선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과 두 아들은 밥을 달라며 큰 소리를 치고, 거실에 드러누워 TV를 보거나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다. 결국, 부당한 노동에 분노를 느낀 피곳씨 부인은 "너희들은 돼지야"라는 쪽지를 써놓고 집을 나간다. 물론 결말은 엄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 가족들은 이제 집안일도 나눠서 하고, 엄마의 표정도 밝아졌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엄마는 자동차를 수리했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확실해진다. 엄마는 집안일을 가족들이 도와주니 행복한 게 아니다. 집안일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해서 하는 것이다. 작가의 메시지는 성 역할은 원래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조정된다는 것이다. 단 32면으로 구성된 이 그림책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적나라하면서 명쾌하다. 

피곳씨 부인처럼 "너희들은 돼지야"라고 속시원하게 내지를 수 있는 현실이 그립다. 페터 한트케의 시가 생각난다. "어린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걸 잘 먹는다. 어린아이였을 때 놀이에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에 쫓길 뿐이다". 영화 '종이달'에서 리카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타인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면 돈이 나오고, 사랑을 받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상냥하게 고객을 맞이하고, 횡령을 해서라도 젊은 대학생에게 학비를 갖다 주고 대신 사랑을 얻는다. 그녀에게 주체적 삶이란 없다. 주체적 삶을 선언한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자유와 가난을 동시에 부여한다. 가혹한 형벌을 선택하고 자유를 얻을 것인가 아니면 억압을 선택하고 병을 얻을 것인가.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현실이기도 하지만 여성에게 더욱 그렇다. 

그래서 리카는 탈주를 선택한 것일까.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에요"라고 말하는 동료 직원 스미의 말을 거부하고, 리카는 의자로 창문을 깨고 바깥의 텅 빈 공간으로 탈주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인도여행 중 길거리에서 한 여자아기가 떨어뜨린 사과 한 알을 주워 한 입 베어 물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만 요란하다. 첫 장면의 성스러움과 대비되면서 향후 리카의 삶이 그리 평탄치만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주체적 삶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건 너무 낭만적이다. 이·삼중의 교묘한 지배와 구속이 여성을 억압하는 시대에 낭만은 오히려 '은유로서의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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