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10. 영화 속 여성의 현실

여전히 현존하는 성차별 현실에 대해 강하게 비판
사랑과 희생, 질투와 욕망으로 가득한 여성 이야기

가혹한 성차별적 이데올로기

예술로서의 영화가 의미 있는 매체라 한다면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넓혀줄 때만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세계 반영의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세계의 총체성을 드러낸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반대의 모습으로 미화되거나 왜곡되는 예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에 대해 그렇다. 

페미니즘 영화이론가인 클레어 존스톤은 "영화예술의 도구와 기교들은 지배이데올로기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되는 매체이기 때문에 그 위험성은 더욱 간과할 수 없다. 현대사회는 경제논리에 의한 약육강식,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 환경 및 생태파괴, 여성과 인종문제 등의 사회적 모순이 중첩된 양상을 보인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처한 현실은 이 모든 모순이 함의하는 실존적 과제들 앞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절망적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여성이 처한 현실을 진실되게 조명하고 있는가.

프랑스 영화잡지 「에끄랑」(1974)에 실린 '페미니즘/영화/여성'(기 엔벨과 모니끄 마르띠노)이라는 글에서 일반적인 대중영화에 나타난 여성의 전형을 크게 12가지 유형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영화 속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적이며 희생적인 존재, 감정적이며 흔들리는 존재, 남성을 유혹하거나 성을 무기로 살아가는 존재, 때로는 영웅적이거나 카리스마적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라는 것이다. 벌써 40여년이 지난 글이라 다소 빗나간 분석이라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다. 흥행에 성공하는 최근 영화들 속 여성을 분석한다고 해도 앞선 의견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영화읽기는 지배이데올로기, 특히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라는 틀에 의해 구조화된 언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다. 
 

맑은 영혼의 눈과 감수성 갖춘 여성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어둠 속의 댄서'(2000)는 한마디로 한 여성이 겪는 처연한 슬픔과 분노의 현실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셀마(비요크 분)는 체코에서 이민 온 여성이다. 그녀는 위싱턴 주의 작은 마을,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고, 그의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셀마는 아들의 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고된 노동을 한다. 고단한 삶 속에서 유일한 휴식이 있다면 춤과 노래의 상상 속에 빠지는 것이다. 뮤지컬 배우가 되는 꿈을 꾸며 고단한 노동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상황에서 그의 공장에서의 노동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실수를 하기도 하고 그 바람에 공장장의 잔소리도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가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듣는 기계 소리는 때론 음악이 되기도 한다. '덜컥, 와르르, 탁, 쿵, 쾅, 텅…', 온갖 기계음들은 그녀의 내면 안에서는 아름다운 선율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시력을 거의 상실한 셀마는 결국 공장에서 해고되고, 자신의 돈 통에 넣어둔 돈으로 아들의 눈을 수술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런데 돈 통에 있던 돈을 도난당한다. 도둑은 그녀에게 집을 빌려준 빌이라는 남자다. 셀마는 빌의 집에 찾아 가서 돈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빌에게 총구를 겨누고 만다. 그녀는 경찰에게 붙잡히고, 일급 살인죄를 적용받아 사형을 선고받는다. 셀마는 아들의 눈 수술을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 기회마저도 거부하고 결국 자신의 마지막 곡과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어찌 보면 신파가 따로 없다. 오직 아들의 눈 수술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던진 희생적이고 가련한 엄마의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것이 여성이 처한 현실이다. 육체적 한계를 갖고 있지만 아들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고된 노동,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마저 감내하는 생명의 의지만큼은 탁월하다. 비록 육체의 눈은 멀었지만 영혼의 눈은 맑아서 보이지 않는 것을 몸으로 그려낼 수 있는 감수성을 지녔다. 기계의 음도 음악으로 창조해낼 수 있고, 어둠을 빛으로 승화시켜내는 힘을 가진 존재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를 오히려 도둑, 살인범으로 내몰고 만다. 그녀의 꿈은 상상 속에서나 실현되는 것이고, 현실은 꿈 꿀 수 있는 자유, 생존할 권리마저 앗아가고만 것이다. 그래서 어둠 속의 댄서는 슬프고 허망하다. 

'어둠 속의 댄서'는 뮤지컬이라는 미학적 변주, 비요크의 신에 가까운 영혼의 목소리, 핸드 헬드 기법을 사용한 카메라의 심한 흔들림 등이 신파적 서사라는 한계를 상쇄시켜 준다. 또한 내용적으로도 아메리칸드림이라는 환상이 어떻게 무참히 깨어지는가를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적 요소도 돋보인다. 체코 이민자 셀마, 그것도 장애를 가진 편모가 살아가기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안전하지 않다. 그 어떤 나라보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정당화되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래서 재판장은 셀마에게 '공산주의자' 운운하며 억울한 누명을 죽음으로 갚게 만든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는 가혹한 것이다.

욕망·복수의 화신, 냉소적 방관자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2010)는 화려한 상류층 고급저택에 하녀로 들어 온 이혼녀 은이(전도연 분)와 주인집 남편인 훈(이정재 분), 그녀의 아내 해라(서우 분)를 둘러싼 에로틱 서스펜스이다. 원작인 故 김기영 감독의 작품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원작에서의 지고지순한 여성캐릭터를 팜므파탈의 모습으로 변모시키고, 원작에 없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서사적 얼개와 갈등관계를 환경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이하다. 

우선, '하녀'의 스토리는 뻔하지만 볼거리가 많다. 분위기는 화려하면서도 음험하고, 관능적이면서 냉소적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여성들의 슬픈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막강한 부와 권력을 지닌 남성 사이에서 여성들은 기생하는 존재이거나 욕망과 복수의 화신, 냉소적 방관자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은이, 해라, 병식은 각자 존재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목적은 동일하다. 은이는 비록 하녀의 신분이지만 자신도 욕망하는 자아임을 은밀하게 때로는 당당하게 드러내 인정받고 싶은 것이고, 해라는 남편의 충실한 조력자로서 대리만족의 티켓을 거머쥔 유일한 존재이고 싶은 것이고, 병식은 타인의 욕망을 관조하고 방관함으로써 위험을 최소화해 안전하게 살아남고 싶은 것이다. 즉, 각자는 이 세상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열악함을 알기에 각자의 생존방식을 취했을 뿐인 것이다.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행태를 취한 은이의 자폭은 눈에 보듯 뻔하다. 충격적 결말이 이 영화의 인상을 각인시키는 묘미이기도 하지만 별다른 결말은 아니다. 막강한 힘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자는 파멸에 이르고 마는 것임을 모르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여성은 사랑과 희생, 질투와 욕망의 화신, 혹은 악녀로 그려진다. 이들 중 온전하게 살아남은 자는 드물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주체적 의지를 끝까지 밀고 나갈수록 더욱 그렇다. 그것은 영화여서라기보다는 현실이 그러함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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