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11. 대물림의 고통을 그린 여성영화

한국 남녀간 임금 격차 OECD 회원국 중 1위
성차별 현실 속에서 빈곤 여성 의 삶 그려내

여성의 몸에 새겨진 전쟁의 피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알렉시예비치는 말한다. "나는 주류 역사에서 누락된 감정의 역사, 여성의 몸에 새겨진 감정의 역사를 쓰고 싶었다."고. 그가 만난 200여명의 여성들은 남성들이 벌인 전쟁의 역사에서 맹목적 혹은 우연적으로 가담하게 되었으나 철저하게 잊혀지거나 역사의 귀퉁이에도 기록되지 못했다. 그녀들의 기억은 남자들의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남자들은 전쟁에서 거둔 승리와 공훈과 전적을 이야기하지만 여자들은 전장에서도 사람, 꽃, 들판, 사랑, 구두를 이야기한다. 전쟁 중에도 생리혈이 터져 나오고, 낙하산을 찢어 드레스를 해 입었다는 여자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소박하다. 어쩌면 철이 없거나 순진하다고도 말할 수 있으나 그처럼 여성은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다. 여성의 몸에 새겨진 전쟁의 피해는 함부로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 <그르바비차>(2005)는 전쟁으로 인해 몸에 새겨진 여성의 피해를 말하는 작품이다. 그르바비차는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의 작은 마을로 3개의 인종, 민족, 종교가 공존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1992년~1995년까지 보스니아내전이 있었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가 이슬람계 몰살이라는 인공청소를 목적으로 내전이었다. 20만 명의 시민이 학살되고, 200만 명이 피난을 갔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의 씨를 말리자"는 슬로건 아래 세르비아군과 민병대는 부녀자들을 조직적으로 집단 강간하는 참극이 벌어진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보스니아 내 그르바비차이다. 집단 강간당하고 수용소에 갇혀 있던 여자들은 아이를 낳게 되고,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를 둔 아이들이 대를 이어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영화 <그르바비차>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엄마 에스마(미르자나 카라노비크 분)는 12살의 딸 사라(루나 미조빅)와 단둘이 살고 있다. 에스마는 사라에게 "아버지는 보스니아 내전 때 전사한 전쟁 영웅"이라고 말해준다. 하나뿐인 딸을 위해 수중의 돈을 털어딸이 좋아하는 농어를 사다 주기도 하고, 수학 여행비를 벌기 위해 나이트클럽의 웨이트리스로 일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사라는 전사자 가족에게는 수학 여행비를 면제해준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라는 엄마에게 아버지의 전사 증명서를 떼어달라고 말한다. 급기야 에스마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세르비아 군인에게 강간당해 너를 낳았다."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사회

영화는 담담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아리게 저미어 온다. 인공청소를 위해 집단강간을 해서 모조리 세르비아인을 낳아버리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프리모 레비의 탄식이 절로 나온다.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은 말한다. "사회는 강간 피해자들을 부끄러워합니다. 떠올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정작 사회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강간당한 여성이 아니라 그런 피해에 대해 눈감았다는 것이다. 진실에 대해 사회가 눈감아 주었기에 가해자 당사자들은 누군가의 아버지로,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만 명의 여성을 강간하고 수만 명을 살해한 전범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가 아직도 유럽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 이것이 유럽이고 아무도 그들을 잡는데 관심이 없다. 이 작은 영화가 보스니아에 대한 당신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가 제작·발표되고 10년 후인 지난 2016년, 보스니아 내전 전범인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ICTY) 재판에서 대량학살 등 혐의로 각각 징역 40년형과 종신형을 구형 받았다. 전범 수장인 밀로셰비치는 지난 2006년 심장마비로 자연사했다.

성차별로 빈곤층 내몰리는 여성들

전쟁만이 여성을 강간한 것은 아니다. 성차별로 인해 빈곤층으로 내몰린 여성들은 성폭력 및 성희롱에 시달리는 상황에 놓이거나 성매매를 통해 겨우 생존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2011년 아사히신문에  '1인 가구 여성 3명 중 1명이 빈곤층'이라는 기사가 떠서 일본 내 ;빈곤 여성'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이것은 단지 일본만의 이슈가 아니다. 2015년 기준, 한국의 남녀 간 임금 격차는 37.2%였다. 즉, 남성 근로자가 100만원의 임금을 받을 때 여성은 62만8000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남녀 간 임금 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다.

일본 르포르타주 작가인 이이지마 유코는 『여성 파산』이라는 책에서 여성 빈곤 문제의 실상을 조명하고 있다. "우리 이웃에도 존재하는 여성의 삶, 가난한 여성과 부유한 여성, 갈 곳 없는 여성들"의 사례를 통해 여성 빈곤의 구조적 문제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고백한다. "집을 나와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면 거리에서 알게 된 남자를 따라나서는 10대 소녀, 학비를 벌기 위해 출장 성매매를 하는 명문대 여학생, 임신 중이거나 출산 직후에도 채용해주는 곳이 없어 임신부 전문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싱글맘 등 여성들의 경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고.   이성복의 시 「그날」에 이런 시구가 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서성거렸고/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동생을 돌보았다". 시에서 받은 충격이 현실이라니. 가히 영화 같은 현실이다. 카렌 예다야 감독의 영화 <오르>(2004)가 이를 증명해준다.

엄마인 루티(로니트 엘카베츠 분)와 17세의 딸 오르(다나 이브기 분)는 텔아비브(이스라엘 서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의 작은 아파트에서 단둘이 살아간다. 엄마 루티는 오랜 매춘부 생활로 심신이 망가진 상태다. 오르는 아픈 엄마를 돌보며 매춘을 그만하라고 한다. 루티는 매번 그러겠다고 해놓고 딸 몰래 거리로 나가기도 하고, 가끔 낯선 남자가 찾아오기도 한다. 오르는 생계를 위해 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해변가로 빈병을 주우러 다닌다. 학교생활은 당연히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친구들과 선생님에게는 "난 괜찮아요."라고 말한다. "괜찮아요.", 오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오르는 식당 주인 아들 이도와 사랑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이도의 엄마 라헬이 엄마를 찾아와 "걔네들은 올바르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오르의 처지(매춘부 엄마를 둔 가난한 처지), 품행(남자애들과 자주 어울린다는)으로는 자신의 아들을 사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도는 오르를 사랑하고 있어요."라는 루티의 말에 "사내애들은 매번 그렇고 그런 거예요."라고 라헬은 화답한다. 한마디로 여자애의 남성편력은 용서할 수 없으나 남자애의 여성편력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오르를 절망하게 한 지점이다.

어느 날 밤, 엄마가 피를 흘리며 들어왔다. 오르는 피를 닦아주며 말한다. "걱정 말아요. 나한테 기대도 돼요.", 오르는 엄마의 대를 이어 매춘부로 나가겠다는 결심을 이렇게 말한 것이다. 더 이상 기댈 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방법은 그것 뿐.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라. 네 나이엔 학교가 더 중요한 거야."라고 말했던 집주인은 오르의 첫 성매매 대상자가 된다. 집세를 낼 수 없어 다짜고짜 그를 찾아가 "들어가도 돼요?"라 말하는데, 주인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오르를 집안으로 들인다. 만면의 미소를 감추면서.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두고, "영화 같다"라고 말한다. 이제 말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현실 같은 영화라고. 누군가는 영화 <오르>가 극단적으로 여성이 처한 현실을 다루고 있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갈 데 없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그리 많지 않다. 정규직 일자리를 갖지 못한 여성은 세탁, 청소, 배달 등의 잡일을 하며 낮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르의 엄마 루티 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몸을 담보로 생존에 투신할 경우 육체적?심리적 피폐는 눈에 보듯 뻔하다. 루티 자신만 피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그의 딸마저 희생양이 된다는 것이 가장 슬픈 현실이다.

사회구조의 문제로 받아 들여야

2000년대 이후 한국은 젊은 여성의 비정규직화가 현저하게 진행되는 추세다. 비정규직 여성은 고강도 노동에 임금은 낮고, 성희롱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게 현실이다. 성희롱을 당하더라도 해고당할 불안 때문에 함부로 발설하지도 못한다. 몇몇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新 신데렐라', '골드미스'는 허구에 가깝다. 실제로 서울시의 월평균 소득 통계에 의하면, 비정규직 여성 가구주의 76.1%는 월 소득이 200만원 미만이다. 또한 월 소득 400만 원 이상의 골드미스는3.6%만이다. 여성 빈곤은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의 문제이다. 몸과 영혼을 팔며 공기처럼 떠도는 슬픈 여성의 가슴은 누가 쓰다듬어 줄 것인가? 그들의 밥과 자유는 누가 보장해 줄 것인가. 엄마의 대를 이어 내 아이가 그런 현실이라면 누가 이를 눈 뜨고 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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