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19. 금기를 넘어 자유를 부르짖은 최초의 여성

'최초'...사회적 평가 절하의 다른 표현
감성과 섬세함 생명을 살리는 힘으로

여성이 어떤 분야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을 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우가 많다. 최초의 여성 비행사, 최초의 여성 기자, 최초의 여성 참정권, 최초의 여성 변호사, 최초의 여성 작가,… 등. 그만큼 여성이 사회적으로 재능을 펼치고 업적을 세우고 성과를 내기에는 어려운 환경이라는 뜻일 게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앞으로도 최초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여성 이름은 무궁무진하다. 

종교·정치적 격량의 희생양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학당'(1508~1511)에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내로라하는 철학자 60명이 총집결해 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플라톤, 손바닥이 땅을 향하고 있는 건 아리스토텔레스, 또 그들의 스승격인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인 알키비아데스, 크세노폰, 아이스키네스, 서판을 들고 있는 파르메니데스 등이 그들이다. 벽화의 하단 왼쪽을 보면 유일하게 여성이 한 사람 보이는데, 바로 최초의 여성수학자라고 하는 히파티아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래 밑그림에는 히파티아가 중앙에 배치되었는데, 그대로 그리면 돈을 안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자리를 이동해 하단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히파티아는 최초의 여성수학자, 천재 천문학자,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여성이다. 그녀는 서기 355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고, 412~415년에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아버지 테온도 뛰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국립 연구소인 뮤세이온의 회원이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관장이기도 하였다. 히파티아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수학과 천문학, 철학을 총망라하는 학문 활동에 전념하였으나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격랑의 희생양이 되어 처참하게 화형 당한다. "감히 여자가 지식으로 제자들 영혼을 농락하고 신의 섭리를 부정해" 라는 편견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잘 알려주는 영화가 <아고라>(2009)이다. 

영화에서 히파티아(레이첼 웨이즈 분)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천재 천문학자로 나온다. 그녀는 로마제국의 최후를 맞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는 진리와 결혼했다"할 정도로 학문에 몰두한다. 자신을 연모하는 제자의 구애에 생리혈이 묻은 천을 보여주며 거절할 정도였다. 서기 391년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이교도, 유대교, 기독교가공존했다. 하지만 기독교가 주도권을 갖게 되면서 갈등의 양상이 깊어진다. 결국 이교도와 기독교간 전쟁이 벌어지고 기독교가 주도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종교와 정치의 광장, 즉 '아고라'였다. 

히파티아는 이교도와 기독교도 중에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 테온은 이교도였지만 아버지의 종교적 신념이 그녀에게 영향을 주진 않는다. 아버지 테온은 "최고의 철학자에게 학문을 그만 두라면 그건 죽으라는 거요."라고 말할 정도로 히파티아의 학문을 지지한다. 그렇기에 히파티아가 어떤 종교적 신념을 가졌거나 특정 이념으로 제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우주의 신비를 캐는 데만 전념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히파티아의 제자들은 정치적 지도자가 되고,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확대된다. 414년경 히파티아는 자신의 제자 오레스테스를 지지하면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범그리스권, 범로마권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히파티아의 영향력은 콘스탄티노플과 시리아, 키레네와 로마까지 미쳤다. 결국, 불안감을 느낀 기독교는 이에 대립하거나 비우호적인 인사들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그 핵심에 히파티아가 있었다. 히파티아가 금지된 마술을 행하고 천체를 연구하며 악기에 전념하는 지옥의 사자라는 이미지를 퍼뜨리면서 히파티아는 마녀가 되고 만다. 또한 예수의 열두제자 중에 여자는 없었다는 게 히파티아 숙청의 근거가 되었다. 415년 3월, 히파티아는 기독교에 의해 사지가 찢긴 채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인류역사상 가장 아까운 여성 천재가 사라지는 사건이었다. 

히파티아가 이렇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당대 로마의 정치적 격변과 종교의 대립에 의한 결과이지만 그 이면에는 여성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우주가 신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하늘은 단순해야 마땅해"라며 우주의 순환을 과학의 원리로 풀어보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은 마녀의 미친 짓으로 치부돼버리고 만 것이다. 지성과 관용을 지녔던 지식인 여성을 마녀로 몰아 살해한 것은 조화로운 우주관,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 주체적 삶에 대한 응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대의 시각으로는 적어도 여성은 그러한 능력을 지니거나 설파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히파티아가 고대의 최초의 여성 철학자라면 중세의 여성 인물 가운데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여성은 힐데가르트(1098~1179)이다. 힐데가르트는 최초의 음악가, 문학가, 에언가, 생태의학자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 천재적 인물이다. 그녀는 베네딕투스 수도회 수녀원장이면서 음악, 과학, 의학, 문학 등 다방면의 연구와 저술활동을 펼쳤다. 또한 수녀원공동체를 건설하고, 기독교내 성평등을 실천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녀는 "네가 본 것을 글로 적고, 네가 들은 것을 말하라"라는 신의 계시를 듣고, 이를 죽을 때까지 실천한 행동가이자 영성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중심의 공동체 구현

영화 <위대한 계시>는 힐데가르트(바바라 수코바 분)의 위대함을 당대 천주교내의 성불평등과 권위주의에 대항해 어떻게 평화로운 공동체를 실현해나가는가에 맞춰 이야기하고 있다. 힐데가르트는 8살의 어린 나이에 독일의 디지보덴베르크 수도원에 맡겨진다. 귀족가문의 10번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신에게 십일조로 바쳐진 것이다. 또한 어려서부터 총명한 그녀의 재능을 키워줄 수 있는 방법은 수녀원에 맡겨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원장수녀 유타(레나 스톨체 분)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종교, 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접한다. 그녀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은 그의 음성을 기록하라는 게시를 내렸지만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녀는 이단으로 몰릴 가능성이 컸다. "내가 보았던 비전은 (…)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맑은 정신으로, 인간 내면의 귀로써 그리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듯이 보통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서 얻었다."는 그녀의 영적인 능력은 중세 교회의 권위주의적인 풍토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헛소리였다. 따라서 수녀원에 들어간 지 30년이 흐른 후, 원장수녀의 뒤를 잇게 되면서 자신의 능력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었다.

우선 그녀가 수녀원장이 되면서 착수한 것은 수녀원의 분리였다. 영화에서는 수녀원의 어린 제자 클라라(파울라 칼렌베르크 분)가 임신을 하는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힐데가르트는 수녀원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것은 수녀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신부나 수사들로부터 수녀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결국 그녀의 명성과 신념에 믿음을 갖는 귀족의 후원에 의해 나에강과 라인강이 만나는 루페르츠베르크에 수녀원을 세운다. 이것이 최초의 수녀원이다.

영화는 힐데가르트의 위대함을 그녀의 초월적 능력, 신비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의 인간적인 면, 예를 들어 딸처럼 가르치던 리하디스(리차디스 본 스타드 분)가 수녀원을 떠나게 됐을 때 느끼는 슬픔과 격분을 있는 그대로 조명한다. 또한 수녀들 사이의 질투,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래와 연극활동을 제안하는 등의 현실적 지혜가 더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어려서부터 병약했기 때문에 약초나 광물, 보석 같은 것을 이용한 치유에 관심이 많았던 덕에 수녀들의 의사노릇도 자연스럽게 할 수있었다. 하지만 더욱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의사소통 능력이다. 

힐데가르트는 수녀원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수녀들을 모아놓고 각자의 의견을 말하는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동일한 규율에 의해 집단생활을 하는 수녀들이라 할지라도 개별성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과 입장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면 그녀는 중세의 인간중심적 민주주의를 실천한 여성이다. 또한 자신이 알게 된 경험과 지식을 기록을 널리 알리는 것이 신의 계시라 믿었던 그녀는 죽을 때까지 이를 실천한다. 단테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까지 영감을 준 것도 그녀였다. 

가끔 '여성은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며 현실적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일반화된 논리처럼 설파하는 이가 있다. 독설에 가까운 비논리이다. 위의 두 편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준 모습은 절대 비이성적이지 않고 비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특정 이데올로기나 신념에 갇히지 않고 공동체의 화합과 상생을 도모하고자 한다. 히타피아는 학문의 열정으로 그걸 보여주려 했고, 힐데가르트는 일상에서의 학문, 예술의 조화를 꿈꾸었다. 그것의 목적은 종교와 정치적 이익을 벗어난 인간중심의 공동체 구현이었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독단보다는 존중을, 이상보다는 일상이라는 현실을!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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