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를 향유하다 12. 가파도 아기 해녀 ②

가족을 위한 끊임없는 희생과 노력 ‘섬 해녀 운명’수용
할망바당 전통 시작점…시대·환경 변화 옛 기억 남아
IT디자이너에서 가파도 막내 해녀가 되기까지 과정 주목

제주도 '해녀의 얼굴' 중 가파도어촌계.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들의 물질은 ‘칠성판(시신을 덮는 관의 나무 판)을 등에 지고, 명정포를 머리에 이고, 저승길이 오락가락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초정월부터 3월까지 잠수굿이 열릴 때면 심방들은 조심하라는 당부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진 한숨 모른 한숨 숨비애기소리 속 깊이 맺힌 거 풀어줍서. 요왕에 인정 걸엄수다. 물 아래서 숨차게 하지 맙서. 들물에 썰물에, 여에 치게 맙서. 둘 이상 짝 짓지 않으면 바당에 들지 말게 헙써“. 해녀 공동체의 합의는 이렇게 전해지고 또 지켜졌다.

△섬에서 나고 물에서 배우고

”너랑 나랑 물벗하여 바당가자“

섬에서 섬으로, 해녀할 운명은 태어나면서 타고 난다는 말도 가파도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다.

김춘희 할머니(77)는 마라도서 나고 자라다 아기업개로 가파도에 왔다. 김 할머니는 2남 2녀 중 큰 딸이었다. 동생도 물질을 했다. 가난하다 보니 학교에 다니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가파도에 살면서 17살부터 물질을 했고 가족을 건사했다. 고 김영갑 선생의 사진집 ‘마라도’(2010.8.30.)에 김춘희 할머니의 어머니가 해녀의 모습으로 담겨있다. 지금 김춘희 할머니의 나이 즈음이다. 우연히 사진집을 손에 넣은 유용예 해녀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어머니의 모습은 김 할머니의 가슴 속에만 있었다. 섬 밖에 나갔다가 또 뭔가를 들고 왔구나 하고 슬쩍 넘겨 본 사진 집에서 해녀옷을 입고 있는 어머니를 봤다. ‘아이코 우리 어멍이다. 아이코 우리 어멍이네 어멍이다.’ 그날의 기억을 유 해녀는 ‘사진집 속 해녀복을 입고 서계신 어머님을 손으로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 반은 웃고 반은 눈시울을 붉히신다’고 자신의 SNS(페이스북 2017.12.12.)에 기록했다. 더 나이가 들기 전 동편 바당 앞에서 나도 어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말도 남겼다.

제주에서 해녀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가족을 위해’라는 이유로 험한 물질을 견디고, 어머니의 또는 할머니의 기억을 밟고 선다. 그 것은 제주 여성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바다 해(海)라는 단어가 어머니 모(母)를 품고 있는 이유를 해녀는 온몸으로 이야기한다.

유용혜작 '할망바다' 중

△ 평생을 함께한 ‘지기’의 정

가파도에서는 뱃물질과 곳물질을 한다. 배를 타고 나가 먼바다에서 작업을 하기도 하고, 뭍에 가까운 바다도 이용한다. 다른 어촌계보다 일찍 할망바당을 만들어 운영했다. 섬 속 섬 해녀들은 나이 여부를 떠나 선택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기도 하거니와 평생을 한 몸처럼 살아왔던 인연의 끈을 쉽게 끊기 어려웠다.

그런 전통은 고령 해녀의 안전 조업을 위한 시책 사업으로도 활용됐다. 제주도는 지난 2016년 나이가 들어 체력적으로 물질이 힘든 고령 해녀들이 안전하게 수산물을 채취할 수 있도록 한 ‘할망 바당’조성 사업 계획을 내놨다.

수심 5m 내외의 얕은 바다에 인공적으로 돌덩이를 떨어뜨린 다음 모자반 등 해조류를 이식하고, 홍해삼과 오분자기 등 각종 수산종묘를 방류해 잠수 등의 부담 없이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앞서 2009년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와 사계리, 남원읍 신흥리 등 3개 마을어장에 할망 바당을 조성했고 2011년에는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와 성산읍 신산리에, 2014년에는 한경면 신창리에 각각 할망 바당을 조성하며 가능성을 엿봤다.

할망 바당 조성·관리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후보지를 물색하고 운영한다는 야심찬 구상이었지만 지금은 가파도에서도 할망바당을 찾기 어렵다. 현실이 그랬고, 시절 역시 그랬다. 할망바당 보다는 은퇴를 유도하는 것으로 혹시 모를 안전사고 위험을 막는 것으로 정책 방향이 수정됐다.

△해녀, 가까이 더 가까이

가파도 해녀들의 사정도 달라졌다. 현직 중 최고령인 86세 라진욱 할머니부터 막내로 이제 40대 초반의 유 해녀까지 바다에서 작업을 한다.

유 해녀는 지난해 정식 해녀가 됐다. 제주에 입도한지 8년만의 일이다. 신규 해녀가 되기 까지의 과정과 이후 해녀 공동체 내부의 변화는 ‘해녀 전승.보전’이라는 중요 과업에 의미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

유 해녀는 30대 초반만 해도 잘나가는 IT 디자이너였다. 초고속 승진과 높은 연봉, 안정적 생활을 보장 받았지만 우연히 가파도에서 만난 해녀와 나눈 대화를 계기로 과감히 제주행을 택했다. 힘들었던 현실에서 벗어나보자고 했던 일은 가파도에 ‘집’이라 부르는 공간을 만들게 했다. 처음부터 바다 작업을 하지는 않았다. 처음 사진이라는 장치를 통해 해녀에 접근했다. 2015년 ‘공익적 사진집단 꿈꽃팩토리’와 함께 다양한 사진 작업에 참여했다. 같은 해 전주국제사진전에서 첫 개인전 ‘할망바다’를 시작으로, 류가헌 ‘쁘리벳(Привет)’(2015), 서울사진축제 ‘Find Your Seoul’(2015)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동명의 사진집도 냈다.

해녀들과 가까이 지냈지만 그것으로 ‘해녀’의 요건이 갖추지는 것은 아니었다. 유 해녀는 2018년 법환 해녀학교에 등록해 80시간의 교육과 3개월의 인턴 생활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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