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미술평론가·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비상임 논설위원
최근 우연히 티브이에서 <머나먼 다리>란 영화를 봤다. 중도에서 봐서 감독이나 배역은 알 수 없었지만, 내용은 2차대전이 배경인 전쟁 영화였다. 연합군이 노르망디를 상륙해서 독일 내륙으로 진격 중인데 다리 하나를 건너지 못하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다. 쉽게 탈환될 것 같으면서도 교착상태에 빠져 서로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다. 연합군도 급하지만, 나치독일도 밀리면 안 되는 절박함을 인지한 듯하다. 그러니 사생결단의 상황이 펼쳐질 수밖에. 이를 돌파하기 연합군 측에서 특수 돌격대를 편성해 다리탈환에 나선다. 연합군 측 사령관이 돌격대 대장에게 왜 돌격대를 편성했는지, 왜 이를 돌파해야 하는지를 강조하면서 여러 수칙을 인지시킨다. 그런데 사령관의 마지막 주문이 인상적이다. <무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모해야 한다는 것은 사전에 <상식이 없음> <엉뚱한 짓> <사려 깊지 못한 행동>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결국 다리는 탈환되고 연합군의 독일 내륙 진군은 전쟁을 종식시켰다. 전쟁의 끔찍한 장면들은 쉽게 잊혀졌지만 사령관의 <무모해야 한다>는 말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예술이야말로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이 아닐까. 어느 예술가가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광인은 언제나 미쳐있는 상태지만 예술가는 가끔 미치는 사람이라고. 가끔 미치지 않으면 좋은 예술이 나올 수 없고 뛰어난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식을 넘어서는 것, 어느 절대의 경지를 뛰어넘는 무모한 짓거리가 아니면 예술의 진정한 창조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제1세대 조각가인 김종영 선생은 예술가는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 족속이라고 했다. 무모하지 않고, 미치지 않고 어떻게 오랜 관성과 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새로운 창조의 문을 열 수 있겠는가.
가까운 20세기 미술을 되돌아보자. 그것이 어떻게 상식으로 이루어진 역정(歷程)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입체파(피카소, 브라크), 야수파(마티스, 브라망크), 추상미술(몬드리안, 칸딘스키), 초현실주의(마그리트, 달리), 추상표현주의(잭슨 폴록, 드 쿠닝)로 이어지는 숨 막히는 창조의 열기야말로 광기의 역정이 아니겠는가. 입방체의 덩어리들을 성냥갑처럼 쌓아 올린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얼마나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는가. 원색 물감을 화면에다 쏟아부은 듯한 야수파의 무모한 짓거리를 감성의 해방이라고 부르짓던 미치광이들을 이해한 사람이 몇 명이었던가.
자기가 어떤 짓을 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가 일이 끝나고 나서야 자기가 한 짓을 볼 뿐이라고 한 이 뻔뻔한 태도를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또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 것이라고 했을 때 무모한 짓거리, 엉뚱한 짓거리야말로 창조의 계기가 아닌가. 이는 참다운 창조의 세계는 결코 평범한 방법으로는 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평범한 예술도 있다. 단 생명이 길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엉뚱한 짓거리를 하는 예술가는 좀처럼 만날 수 없다. 이를 예술의 태평성대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은 자기 속에 안주하면 할수록 평범해진다. 그러한 상황은 예술가 자신뿐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마저 평범하게 만듦으로써 종내에는 한 시대를 병들게 한다. 예술이 평범했던 시대일수록 그 사회는 정신적 공황을 겪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