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T.S 엘리어트 「황무지」

우리 곁에 봄이 왔다지만 아직도 봄은 멀리 있는 듯 하다. 지구 곳곳에서는 질병과 자연재해와 전쟁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봄은 보이지 않고 여전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이 말은 영국 시인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첫 구절이다. 

20세기 대표적인 시의 하나로 꼽히는 「황무지」는 현대 문명에 갇혀 생명의 기운을 잃은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20세기의 벽두에 치러진 세계1차대전은 수많은 생명이 상실된 형언하기 어려운 비극이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현대인이 스스로 만든 재앙의 굴레를 비판하고 있다. 신은 인간에게 축복의 땅을 주었지만, 인간은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엘리엇은 섬뜩한 이미지와 반복적인 리듬으로 현대의 삶과 인간의 모습을 묻고 있다. 황무지란 원래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다. 이 시에서 황무지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문명을 뜻한다. 20세기 문명은 왜 생명을 잉태할 수도, 생명을 길러 낼 수도 없는 황무지가 되었는가.

물질과 과학문명에만 사로잡힌 현대인은 생명의 존귀함과 정신 세계를 무시하면서 살아간다. 갈수록 이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진정한 인간의 행복과 공생을 얻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늘만 살고 말겠다는 듯이 인간은 정신과 영혼은 모두 내던져버리고 끝없이 물질적·육체적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다. 

엘리엇은 현대인의 삶에서 '무한한 늙음'과 '죽음'을 향하여 치닫는 절망을 보았다. 우리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그 절망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함이다. 시인은이 시에서 현대의 정신적 메마름, 인간의 일상적 생활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 생명을 외면하는 삶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20세기를 넘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갈수록 물질과 육체에만 탐닉한 채 정신적 삶의 가치와 소중함을 버리고 있다. 인간 욕망의 불길은 자기파멸적임이 분명하다고 엘리엇은 경고한다. 욕망은 범람하지만 반성은 하나도 없는 현대인의 상황은 그 자체로 불모의 땅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탐욕이 만든 코로나라는 질병이 오랫동안 전 세계를 휩쓸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는 자연재해가 거듭 일어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다시 전쟁이 일어나 무고한 민간인과 노약자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진정한 꽃을 피울 수 없게 된 황무지 같은 현실, 이곳은 인간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갈수록 뿌리 내릴 한 뼘의 땅조차 발견할 수 없는 삶의 상황이 인간을 절망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질병도 전쟁도 자연재해도 없이, 모든 생명에 새로운 물기가 흐르고 자연의 순리와 함께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는 사월을 우리는 바란다. 진달래 꽃망울처럼 그리움이 피어오르고, 부리 고운 산새처럼 아름다운 사랑 노래를 부르고, 어딘가 길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이 세상에서 왜 갈수록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인가.

봄이 꿈에서 깨어 활기차게 심호흡을 하듯이, 이 세상의 봄도 밝고 아름답게 활짝 피어날 시간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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