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눈물이란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의 표현 방식이다. 때로 눈물은 슬픔을 해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인생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태도를 이루게 된다. 흔히 인간의 욕구란 생존을 위한 욕구, 생리적 욕구, 애정과 공감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된다. 이런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눈물로서 감정을 토로한다. 갓난아이들이 배고플 때 우는 것은 같은 이치다.
눈물의 원인과 종류는 다양하다. 무엇보다 감정이 고조될 때, 이를테면 슬프거나 낙심이 되는 상황일 때 눈물을 흘린다. 그렇지만 행복할 때도 눈물이 난다. 기쁨과 희열을 느낄 때 흘리는 눈물은 행복의 눈물이다. 또한 자신의 감정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울 때 그것을 보면서 함께 동화되어 흘리는 눈물도 있는가 하면, 잡아먹히는 동물이 불쌍하다며 거짓 눈물을 흘리는 '악어의 눈물'도 있다.
일반적으로 삶에서의 '눈물'은 사람들이 표현해내는 슬픈 감정의 편린이다. 기쁨보다 슬픔을 느낄 때 슬픔 속에서 삶의 내면적 가치와 순수성을 지키려 우는 경우가 많다. 현대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모두 슬픔을 삶의 한 부분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내부에는 크든 작든 슬픔이 담겨 있다. 누군가의 슬픔을 바라보며 슬픔에 대하여 발화한다는 것은 슬픔이 슬픔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이 소중하고 숭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물은 완결된 하나의 명사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지속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동사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고통과 불의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슬퍼한다. 국가권력자들의 터무니없는 전쟁으로 인해 애꿎은 사람들이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백사장 위에 새겨진 글자처럼 금세 사라지는 슬픔도 있지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처럼 가슴에 남아 있는 슬픔도 있다. 슬픔으로 인해 사람들은 오늘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눈물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다. 우리는 슬픔이나 불행을 당했을 때 한바탕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희극보다 비극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우리의 정서에 더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카타르시스란 고대 그리스어로 정화와 배설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인간은 비애를 맛봄으로써 마음속에 억눌린 정서를 순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들과 많은 이별을 하며 슬퍼하지만, 정작 슬픔을 위한 진정한 슬픔의 방식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다. 슬픔은 누군가의 고통과 눈물의 흔적으로 남는다. 시간과의 이별, 사람과의 이별, 이 세상과의 이별, 우리는 이 모든 것과 기약없는 이별을 해야 하고 그들을 애도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서 타자의 '밖'에서 위치하는 '나의 외재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타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주시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상호 동등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주체의 목소리를 거두고 고통을 받는 타자에 침투해서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슬픔은 나의 것으로 전화될 수 있다고 했다.
많은 문학 작품에서도 슬픔을 어떻게 슬퍼할 것인지 슬픔이 가져오는 우울과 허무의 분위기가 나타난다. 작가들은 현대문명과 자본주의가 촉발한 삶의 우울한 모습을 개인적·사회적 층위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현대적 삶의 양상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슬픔과 우울은 자신들의 문학에 지배적 정조로 미학화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처럼 슬픔을 '슬픔이여 안녕'이라고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우리에게는 필요한 일이 아닐까.
인생의 수레는 슬픔의 연속으로 굴러간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때로 눈물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생의 무대를 확장해 나간다. 아픈 상처는 눈물로 채색하기도 한다. 강물이 어딘가로 흘러가면서 스스로를 정화하듯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인간은 울고 싶을 때가 많다. 눈물은 아픔과 슬픔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 고통의 뿌리를 제거하는 영혼의 위무제이기도 하다. 눈물이야말로 인생과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지상에서 가장 고결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