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한강 「흰」
계속된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얀 눈 천지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은 당연한 자연 현상이지만 올해는 유별나게 눈 내리는 날이 많다. 산과 들판, 도시에도 눈이 내려 하얀 세상을 이루고 있고, 곳곳에는 잔설이 수북이 쌓여 있다.
'희다'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른 결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그 가운데에서도 '희다'는 색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깨끗함' 혹은 '순수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대로 그것은 쉽게 오염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면서, 건너편에 존재하는 검은색의 의미를 연상한다.
'희다'라는 단어의 관형어인 '흰'이라는 제목의 한강 소설 「흰」은 그 단어의 의미를 탐색하면서 등장인물의 삶을 다양하게 비추어준다.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설 「흰」은 2018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가 없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된 소설은 총 65개의 이야기로 파생되어 '나'와 '그녀'와 '모든 흰'이라는 세 개의 장 아래 스미어 있다. 한 권의 소설이지만 때론 각 작품은 한 편의 시로 읽힘에 손색이 없으면서 소제목 아래 각각의 이야기들이 밀도 있는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한 편을 읽을 때마다 가슴을 묵직하게 만드는 소설 「흰」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소환되는 사물들, 예컨대 강보, 배내옷, 달떡, 안개, 흰 도시, 흰 돌, 흰 뼈, 백발, 구름, 백열전구, 백야, 흰나비, 쌀과 밥, 수의, 소복, 연기, 아랫니, 눈, 눈송이들, 만년설, 파도,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재, 소금, 달, 레이스 커튼, 입김, 흰 새들, 손수건, 은하수, 백목련, 당의정…. 모두 흰 것을 연상하고 그들을 불러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흰 것을 보고 읽으면서 흑과 백,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한다.
소설 『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백과 흑에 의해, 밝음과 어둠에 의해, 유한을 우주라는 무한으로 확장시키면서 사라진다. 어딘가를 넘나든다는 것은 유연한 몸과 사고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다. 유연한 사고가 빚어내는 끌어안음은 누군가와 소통하고 연대를 이루게 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 이쪽과 저쪽의 소통, 나와 타자의 포옹은 가능하게 된다.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고 강보가 관이 되었"듯이. 흰색은 언제나 포옹과 소통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색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 해온 '흰' 것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삶이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몸부림치던 아득한 젊음의 시간을 건너 지금의 삶을 살게 해준 내게 '흰' 색의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의 삶은 밝음보다는 어둠이,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은 듯했다.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삶의 연속이었다. 세상이 힘들고 버겁게 느껴질수록 존재의 무게는 한겨울의 삭풍 앞에 선 것처럼 나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내가 원했던 삶과 살아내야 할 현실 속의 나는 언제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서 다른 온도를 만들면서 가슴에 결로(結露)를 만들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를 길 앞에 서서 우리는 길잃은 짐승처럼 울부짖어야 했다. 그렇지만 눈앞의 삶을 살아내어야 한다는 의지를 다독이며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존재를 다스리며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다.
우리는 항상 흰색의 백만 좋아하고 검은색의 어둠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늘 흑백논리로 세상을 대한다. 우군이 아니면 적이요. 옳은 것이 아니면 나쁜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빛을 사랑하듯이 어둠도 사랑하라. 둘은 늘 하나의 뿌리이며 공존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천사와 악마가 함께 있다. 천사를 좋아하듯이 악마도 사랑하여 보라. 천사와 악마는 같은 형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흑과 백, 어둠과 빛,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 낮과 밤이 교차하면서 세상은 구성된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해 질 녘에서도 우리는 존재한다.
「흰」에서 작가는 말한다. 깨끗하기만한 '하얀' 과는 달리 '흰'은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삶과 죽음'이라는 모순된 것을 품고 있는 '흰'처럼, 삶에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당위적 요구가 담겨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