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서정주 「서정주시선」

세상이 아무리 소란스럽고 힘들어도 계절의 변화는 어김이 없다. 겨울이 지나고 우리에게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새로이 다가온 봄에는 모든 것이 생동한다. 4월의 전경(前景)은 '잔인한 달'이 아니라 순정한 아우성으로 몸부림친다. 

세상의 모든 꽃과 초목들이 자연의 거대한 축제에 빠질 수 없다는 듯이 연두의 빛깔로 얼굴을 내민다. 연두의 빛깔에는 지금 막 시작하는 생명의 두려움과 조심스러움 같은 것이 담겨있다. 날이 따뜻해져서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족두리 쓴 새색시같이 부끄러운 표정이 가득하다. 한겨울 숨어 있다가 사물사물 모습을 드러내는 초목들은 연두의 빛과 색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아이같이 귀엽고 애틋하고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어 자꾸 눈길이 간다.

연두에는 지금 막 시작하는 생명의 부끄러움과 두려움 같은 게 담겨있다. 연둣빛에 자꾸 마음이 가는 까닭은 새로운 세상과 자연의 출발에 대한 간절하고 눈부신 갈망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록으로 진화해야 할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 연두의 삶은 버겁다. 지난겨울의 힘들고 어려웠던 보속(補贖)의 거울을 닦아내느라 애쓰던 마음이 없었다면 연두의 출발은 없었으리라. 무엇이든 다 새롭게 일구어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던 그날들, 우리는 그때 무엇이었는가. 연두는 그 시간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봄을 맞이하는 꽃이 눈부시고 화려하다면, 신록을 기다리는 연두의 마음은 생동적이고 황홀하다. 생명이 숨쉬기 시작하는 연두는 아름다운 꽃잎이 피어나는 것을 도와주려는 듯이 천지를 뒤덮는다. 만개한 꽃에서 환희와 사랑을 맛본다면 연두에서는 용기와 희망을 발견한다. 눈으로 빨려 들어오는 연두의 빛깔은 번잡한 세상사에 시달린 심신을 씻어주며 정화시켜 준다.

되돌아보면 삶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죄는 어찌 이리 무거울까. 그렇지만 연두와 신록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지은 죄는 모두 정화되고 새로운 사랑의 마음이 피어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연두와 초록의 시간을 이렇게 노래한다.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또 한번 날 애워싸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가슴 벅찬 연초록빛 향연 속에서 남몰래 사랑을 품은 주체할 수 없는 시인의 마음에는 영탄을 너머 신음마저 새어 나올 지경이다. 터질 듯 감출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은 바로 저 연두의 빛으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리라. 

사무치게 아름답다는 말,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연둣빛으로 물든 길을 산책할 때이다. 연두는 이른 신록으로 이 세상에 대한 섣부른 감탄도 어설픈 사랑도 드러내지 못하는 초벌구이 같은 빛깔이다. 신록을 기다리며 또 다른 희망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도 저도 못하며 어중간하게 서 있는 연두의 시간은 슬프다. 연두의 짧고 아름다운 수명은 신록이 오면 끝난다. 얼푸르게 비치며 아슬아슬하게 힘들던 삶의 순간들을 모두 정리하고 이제 초록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어야 할 시간이 왔다. 

숲의 잎들이 짙게 물들기 시작하는 여름이 오면 연두는 마지막 힘겨운 숨결을 내뱉고 한 생애를 마감한다. 초록은 연두의 짧았지만 아름다운 생명을 이어받는다. 연두가 초록으로 몸바꾸는 무상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아득한 한 생명과 삶의 전율을 바라본다. 봄마다 못견디게 서럽게 잠시 피었다 지는 시한부 꽃들의 생명, 흰소리치며 한평생을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인간의 삶은 모두 연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찬란한 봄날에 잠시의 생명으로 피었다 지는 꽃의 삶이 반드시 슬플 일도 아니고, 인간의 한평생 삶과 같이 반드시 길다고 기쁠 일도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한 시절에 아름다운 빛으로 살다가는 생, 그것이 바로 연두의 삶이 아닐까. 짙은 신록이 오기 전에 마지막 연두의 빛에 물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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