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3대 항일운동·유적지 소개]
무오 법정사 종교계 중심 확산
조천만세운동 도내 불씨 지펴
해녀 항쟁 1만7000여명 대규모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은 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하고 연합군이 제시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 그 결과 일제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가 해방됐다. 특히 해방 전 제주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꺾이지 않는 항거의 역사가 선연했다. 광복절을 맞아 제주도의 3대 항일운동과 일제의 흔적을 알아본다.
△3·1운동 이전 최대 규모의 단일 투쟁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6월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3명이 제주 산천단에서 형제의 의를 맺으며 시작됐다. 이들은 김연일 스님 등 30여명과 함께 법정사를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계획하고 격문을 뿌렸다. 불교계 스님과 보천교 신도, 민초 등 약 700명이 모여 1918년 10월 6일부터 7일까지 주재소를 습격하고 불태웠으며 주재소장 요시하라를 포박했다. 이후 가담자 66명이 송치돼 재판에 넘겨졌다. 이 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전 단일 투쟁으로 최대 규모였다.
당시 법정사는 항일 운동 중 일본 순사에 의해 불태워져 현재 축대 등 건물흔적만 남아있다. 현재의 법정사에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상징탑과 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신위를 모신 의열사가 세워져 있다.
△조천서 울려퍼진 '만세'
조천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6일 당시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한 것이 불씨가 됐다. 만세운동은 당해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총 4차에 걸쳐 진행됐으며 김연배 등 시위를 주도하던 4인이 체포되며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만세운동은 함덕·신촌·신흥 등 인근 지역뿐 아니라 서귀포로도 확산돼 제주지역의 다양한 민족해방운동의 모태가 됐다.
해방 이후 만세운동이 시작됐던 미밋동산에 3·1운동독립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매해 3·1절 기념행사를 가졌고 미밋동산은 만세동산으로 불렸다. 1990년 재일동포 김봉각씨가 5억원을 기부해 만세운동 기념탑이 조성됐고, 1997년 8월 15일 제주항일기념관이 개장했다.
△해녀가 주도한 항일 운동
해녀항일운동은 1931년 해녀 조합의 횡포에 분노한 하도리의 해녀들이 이듬해 1월 7일부터 벌인 시위에서 출발했다. 이후 1월 12일 세화리 장날을 기해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으며 제주도지사는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수용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일제는 사건의 조사와 함께 청년 운동가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를 저지하고자 각 마을 해녀들이 시위를 벌였지만 1월 27일 종달리 해녀들이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며 해녀들의 저항은 진정됐다. 제주 해녀 항쟁은 약 1만7000명이 참여했고 크고 작은 집회 및 시위 횟수가 230여회에 이르는 대규모 시위 운동이었다.
제주해녀항일운동 기념공원은 구좌읍 하도리에 위치하며 내부에 제주해녀박물관이 함께 있다.
△제주에 남은 일제의 상흔
알뜨르 비행장은 대정읍 상모리 일대에 일제가 중일전쟁을 대비해 지은 군사 기지다. 1931년 1차 완공, 1938년 2차 완공됐다. 이후 태평양 전쟁 말기 패색이 짙어지자 알뜨르 비행장은 해안 전진 거점 지역으로 진지화됐다. 1944년 10월 3차 공사가 시작됐으나 완공되지 못하고 종전됐다. 알뜨르 비행장은 비행장 관련 시설과 오름 지하호, 해안 어뢰정 갱도 진지 등으로 구성됐다. 이외에 일제의 제주도 요새화 흔적은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 등이 남아있다.
일제가 남긴 콘크리트 구조물과 벙커, 녹슨 격납고 등은 태평양 전쟁의 참혹상과 강제 징용의 아픔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