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우리는 일생동안 수많은 대상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 눈을 뜨면 시간을 보기 위해 시계를, 가족들의 얼굴을, 손에 잡히는 휴대폰을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다. 인생과 세상을 생각하고 인식하기 위한 마음의 눈도 있다.   

세상과 사물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어떻게 생각하고 인식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조의 눈과 사색에서 나오는 것이다. 관조와 사색이란 오늘날에서 삶을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 그리스어에서 테오리아(the-oria)는 '바라본다'라는 의미의 동사로서, 구경거리 혹은 광경이라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테오리아를 정치적 행동을 포함하는 윤리적 실천행위(praxis)와 예술적 활동으로서의 제작(poiēsis)으로 구별하였다. 테오리아를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영원불변한 형이상학과 예술을 통해 대상의 진리를 바라보는 영혼의 활동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명예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활동,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향락적 활동, 부를 목적으로 하는 영리적 활동에서 '관조적 생활'을 인간 최고의 이상적 행복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가 여타의 정신적 활동들보다 어떻게 뛰어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논점을 제시하면서, 관조의 삶이 가장 탁월한 덕을 따르는 것임을 보여주는 거와 동시에 정신적 쾌락 내지 즐거움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관조는 다른 어떤 정신활동보다도 즐거운 활동이기 때문에 관조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즐겁고도 이성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이성적인 활동이야말로 대상을 인식하기에 가장 좋은 활동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이성 활동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관조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지적인 덕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를 얻는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진리를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관조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을 바라보다 보면 생각이 길어지고, 다시 생각이 일어나면 관조의 상태는 길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관조는 수동적인 각성이요 무위이지만 동시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색의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아는 무시간이나 영원의 공간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고민하는 자아와 타자, 정신과 육체, 절대와 상대, 의식과 형상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나름대로의 '최상의 깨달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 채 주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에 본질과 실체를 보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살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일들은 언제나 미완성으로 남는다. 어떻게 우리는 주변에 머물지 않고 중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관조는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며, 진리에 가장 깊이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관조의 삶을 통하여 당신은 새로운 존재가 되어 거대한 해방 속에 부유하면서 여태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관조는 세계와 인생에 대하여 무한한 사색을 가능케 한다. 사색과 명상은 새로운 세계로 초월해 가기 위한 도구적인 방법이다. 관조는 사색을 열리게 되고, 사색은 곧 변형되고 진화한다. 그렇기에 잠시 동안이라도 단순한 자아가 되어 단순히 보는 자로 존재해 보라. 그저 사물과 풍경을 단순히 바라보는 자로 편안히 있어 보라. 보여 질 수 없는 것에 머물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려고 애써 보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재 속에서 있음이, 불명확함 속에서 명료함이, 구속 속에서 엄청난 자유가, 오직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구속으로부터 엄청난 자유를 느끼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