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희 비상임논설위원·제주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기록된 제주에서 있었던 큰 전쟁이나 전투 또는 많은 인명이 희생당한 사건은 세 번 정도 있었다.

첫 번째는 13세기 중반 삼별초가 대몽항쟁이라는 명분으로 진도를 거쳐 이곳 제주로 들어오면서 예고됐다. 삼별초의 입도는 탐라로 시작해 제주로 이어지는 오늘까지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외부인들이 대거 섬으로 들어온 일대 사건이었다. 3년이 지난 후 김방경과 흔도를 앞세운 고려와 몽고연합군이 제주해협을 건너 들이닥쳤다. 삼별초는 이들을 맞아 분전했으나 결과는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패배했다. 두 번째는 이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후 발생한 목호의 난이었다. 최영이 이끄는 대군은 추자도를 거쳐 명월포로 들어와 반란세력들과 새별오름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범섬까지 쫓아가며 섬멸했다. 당시를 기록한 문헌에는 피가 내를 이뤘다고 할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다음이 우리가 아는 현대사의 비극 4·3이다.

그렇다면 이곳 제주에는 이렇게 아픈 기억만이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이 제주대첩이라고 불리는 조선 중기의 승전기록이다. 얼마 전 이와 관련된 제주대첩 470주년 학술세미나가 열려 다녀왔다.

남해안을 비롯해 제주에는 14세기부터 왜구들의 출몰로 큰 골치를 앓았다. 이들은 16세기까지 걸핏하면 나타나 노략질을 자행하고 인명을 살상했다. 고려 말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왜구들은 규모도 커지고 지역도 내륙지역까지 깊숙이 들어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등이 왜구에 대한 전승기록들이다. 비슷한 시기 제주에서도 왜구들은 설쳤다. 기록에 있는 것만해도 14세기에 9회, 조선에 들어와서도 을묘왜변이 발생하는 1555년까지 무려 30여회가 넘는다.

왜구들의 성격도 초기에는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한 생계형 왜구에서 16세기 들어서는 밀무역으로 눈을 돌리면서 규모화 되고 체계적인 조직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들은 중국 동쪽 해안까지 진출하면서 중국인들까지 이들과 합류하게 된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의 항로 중간에 있는 제주를 주목하고 을묘년(1555년) 6월 1000여명의 병력으로 화북포로 들이닥쳤다.

당시 제주목사 김수문은 특공대 70여명으로 효용군을 편성하는 한편 4명의 용감한 돌격대를 앞세워 적진을 흩트림으로써 적장을 사살하고 왜구를 격퇴하는 승전을 올렸다. 명종은 이 승전보를 접하고는 대첩이라 명명했다. 이날의 승전은 단순한 왜구를 물리쳤다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후기 왜구들이 제주를 동아시아 해상활동의 장기적 거점으로 삼으려던 전략을 철저한 방위와 공격으로 분쇄시킨 사건이었다. 또한 이 전투의 승리는 김수문 목사와 용맹한 군사들과 함께 관과 민이 밀착해서 이뤄낸 값진 성과였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기억되고 전승돼야 한다. 침소봉대도 안되겠지만 봉대침소도 경계해야 한다.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을묘년 승전 기록이 제대로 대접받고 기억되며 자랑스런 우리의 역사로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학계, 교육계, 문화예술계는 물론 관의 역할분담과 분발이 필요하다.

그런면에서 제주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여러 형태로 전시하고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인 국립제주박물관에 지역의 유일한 승전사 기록인 을묘년 대첩의 기록 전시는커녕 연표에도 없는 것은 아쉽다 못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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