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1월 25일 첫 선을 보인 이래 지난 14일까지 모두 115회에 걸쳐 연재되면 제주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야기 제주역사".왕조사·정치사 중심으로 전개됐던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대중적 역사 서술의 장을 시도했던 이야기 제주역사 집필에 참가했던 필진들이 지난 24일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제주
약 3년 전 연재를 시작하면서 우리들은 좀더 이해하기 쉽고 학문적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제주 역사를 쓰겠다고 약속했었다.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글을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 때 연재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또 글이 어렵다는 지적도 있었고 사실과 다르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렇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독자 여러분의 많은
◈해방이후 국제자유도시와 제주의 미
◈제주도개발특별법과 제정반대운동 1970년대 이후 제주도의 개발은 국가 주도로 추진됐다. 중앙집권적 제주 개발의 목적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관광산업을 발전시켜 제주도를 외화를 벌어들이는 창구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뒤 국가의 의도와는 달리 외국관광객은 별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국내에서는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성장했다. 이러한 국가주도의 관광개발은 1
◈해방이후 송악산 군사기지 설치 반대운동 1987년 이후 제주에서는 지역 주민들의 삶을 지키기 위한 사회운동이 크고 작은 형태로 곳곳에서 일어났다. 앞서 살펴본 제주시 탑동 매립 반대운동과 함께 송악산 지구 군사기지 반대운동은 1988년 모슬포의 송악산 주변지역에 군비행장을 건설하려던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지역주민은 물론 도민, 대학생,
◈해방이후 탑동 매립과 주민운동의 발전 탑동이 지금은 매우 복잡한 도심의 중심 상가 지역이지만 원래는 제주시 중심부의 바다를 끼고 있던 전형적인 어촌이었다. 탑동은 수심이 낮고 검은 돌들이 흩어져 있는 개펄이기 때문에 각종 어패류가 자라 해녀들이 수산물을 채취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 일대가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제주시가 1978년
◈해방이후 물의 혁명 제주도 사람의 생활은 해방 이후 50년을 거치면서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이는 주로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바가 큰데 우선 사방 팔방으로 뚫린 길과 자동차의 보급으로 제주도내에서의 이동은 매우 빨라졌으며 전기와 통신 시설은 물론 상하수도 시설로 생활이 무척 편리해졌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제주도만이 아닌 전국적인
◈감귤산업의 발달과 바나나 해방 이후 제주도 농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감귤이었다. 우리가 보는 감귤은 대부분 1950년대 일본으로부터 묘목을 가져와 심으면서 재배가 시작됐는데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소비시장과 연결이 쉬워지자 매우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온 섬에서 재배됐고 가장 인기 높은 고소득 작물로 떠올랐다. 이 때문에 제주농민들에게
◈해방이후 서귀포의 발달과 토지투기 서귀포시는 제주도 제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도시로서의 역사는 매우 짧은 편이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평범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서귀포는 일제 침략기에 도제(島制)를 실시할 때 서귀면이 되고 지청(支廳)을 두어 7개 면을 관할하는 중심지로 삼으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정책에 의해 대정골과 정의골
◈해방이후 인구성장과 도시개발 제주도는 해방 이후 매우 빠른 속도로 인구가 성장했다. 이는 물론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제주도 섬에 50만이 넘는 인구가 모여 살게 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최근에 올수록 조사방법이 정확해져서 사실에 가깝겠지만, 해방 직후부터 1970년대까지의 통계는 여러 모로 잘못된 통계치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해방 이후⑩ 제주 산업구조의 변화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한국사회의 전체 산업구조의 변동에 따라서 도민들의 삶의 양식도 크게 바뀌어 갔다. 한국 정부는 저임금 노동력을 바탕으로 자본·시장·기술·원료는 해외에 의존하는 대외지향적 산업화전략을 추구했다. 이러한 개발논리는 지역개발과 국토의 공간 분화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동남부 해안지대와 수도권에 공단을 집
◈중산간 마을의 복구 과정I 입산금지가 풀린 것은 1954년 가을이었다. 4·3 발생 후 6년 6개월만에 제주 전 지역이 평상시 체제로 환원된 것이다. 1948년 11월 제주도 전역 내려진 소개령(疏開令) 때문에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타 버렸고 군경토벌대는 마을 주민들 가운데 무장대와의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를 상관하지 않고 무차별로 학살했는데 특히
◈해방이후 ⑧ 6ㆍ25전쟁과 제주사회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8일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제주도에서는 4ㆍ3의 마무리 토벌을 위해 주둔하던 해병대 신현준 사령관이 제주지구계엄사령관을 겸임했다. 정부는 7월 16일 제주주정공장에 육군 제5훈련소를 설치해 신병 양성에 나섰다. 8월 3일 중고생으로 조직된 학도돌격대가 결성됐고 이들을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제주에서는 또 한번 광풍이 불어닥쳤다. 무차별 학살과 파괴가 이루어진 폐허 위에 또다시 불법적 예비검속 과 집단학살이 이루어졌다. 제주뿐만이 아니었다. 죽음을 면해 육지 형무소로 갔던 제주출신 재소자들이 집단적으로 끌려가 구덩이 속에 쳐박혀 총살되었다. 명분은 간단했다. 인민군 남침에 동조할 수 있는 불순세력을 사전에 처리하
◈현대⑥ 4·3(2) 대토벌과 학살 1948년 10월 이후 1949년 3월까지 약 6개월 동안 제주도 전역에 걸쳐 중산간 지대를 중심으로 군ㆍ경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전개됐다. 이 시기에 중산간지대의 민간인들에 대한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지고 집단학살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이전의 학살이 젊은 남자를 위주로 이루어졌던 반면, 11월 중순 이후에는 노인
◈해방이후⑤ 4ㆍ3의 발발과 전개과정 3ㆍ1사건 후 제주도 좌익진영은 미군정의 계속되는 탄압에 직면하였다. 1948년 초 조직의 핵심간부들이 대거 검거돼 조직이 궤멸 상태에 빠졌다. 2ㆍ7투쟁을 거치면서 전도적으로 검거 바람이 불었고, 붙잡힌 청년들에 대한 가혹한 취조가 이뤄졌다. 조천에서는 3월 6일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혹독한 고문으로 숨졌고, 14
◈해방이후 ④ 3ㆍ1사건 1947년 3월 1일 오후 2시 50분께.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는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경찰의 총탄에 맞은 주민 여러 명이 피범벅이 된 채 나뒹굴었고 결국 6명이 사망하였다. 이 총격 사건 이후 제주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상황에 빠졌고, 이듬해 4ㆍ3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다. 1947년 3월 1일은 해방 후 두 번째 맞
◈해방이후③ 해방직후 사회상 8ㆍ15 해방으로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난 제주도민들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맞는 느낌이 남달랐다. 제주농업학교생 800여명은 곧바로 8월 16일 청년학도단을 결성하여 일본군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학교 구내에 있는 일본군사령부의 무기고를 점령하려고 대치하기도 하였다. 이어 각 지역별로 보안대ㆍ치안대ㆍ자위대 등을 결성하고 각 기관별로
◈해방이후 ② 태평양전쟁 말기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제주도 근해의 상황이 심각해졌다. 1944년 봄부터 미해군 잠수함이 제주근해에 자주 출몰하였다. 일제는 1944년 5월 제주도비행장을 완성하여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1944년까지만 하여도 제주도 수비병력은 총 200여 명에 불과했다. 1944년 10월 미군에 의해
이번 회부터는 해방 이후의 제주도 역사를 정리한다. 제주사회는 과거에는 전혀 겪어 보지 못했던 엄청난 변화를 지난 50여 년 동안 겪었다. 때문에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도민들의 삶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어렵게 생각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기나긴 식민지 지배는 끝이 났다. 제주도에 미군이 들어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