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제주지방의 수취구조¶ 조선시대에는 토지, 집, 사람으로 크게 구분하여 일반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받았다. 토지에 대한 세금을 전세(田稅) 혹은 조(租)라 하였고, 집에 대한 세금은 가호세(家戶稅)로 특산물[調], 사람에 대한 세금은 인두세(人頭稅)로 노동력[庸]으로 징수하였다. 이를 흔히 조용조(租庸調) 3세라 한다. 직접세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1.01.22 01:40
-
▲1405년 = 전국적인 양전(量田) 실시▲1413년 = 제주도의 전지(田地) 측량을 요청함▲1415년 = 제주의 수조법을 정하도록 함▲1419년 = 제주에 양전 실시▲1420년= 제주에 수조법(收租法) 실시▲1421년 = 제주 판관 및 대정·정의현감이 전지(田地)의 손실을 답험한 뒤에 제주도안무사가 순행하여 점검하는 것으로 항식을 삼음▲1426년 = 제주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1.01.22 01:40
-
◈조선시대 조선 후기 신분구조▲향교와 향청을 장악한 양반 조선시대 제주에 양반이 과연 있었느냐는 질문을 간혹 받는다. 그러나 본토 지역의 명문 양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엄연히 제주지역에도 양반은 존재하고 있었다. 탐라국의 지배신분층은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크게 두 개의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고득종 등과 같이 제주출신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일정한 관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1.01.15 01:40
-
조선사회는 기본적으로 양반 관료제 사회이다. 그리고 이를 지탱했던 커다란 두 가지 기둥은 바로 지주제와 신분제였다. 지주제가 땅의 소유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신분제는 혈통과 세습에 기초하여 인간과 인간을 차별하는 것이었다. 제주 지역의 경우 중산간 지역이 대부분 목장 지역으로 국유지였기 때문에 주민들의 토지소유는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1.01.15 01:40
-
▲1547년 = 김만현 등 64명 중국에 표류▲1576년 = 양준 등 22명 중국 표류▲1587년 = 대마도주 제주 표류인 송환▲1665년 = 김원상 등 일본 표류▲1687년 = 김대황 등 24명 안남국에 표류▲1714년 = 정창선 등 나가사키에 표류, 생환▲1741년 = 제주인 21명 유구국에 표류, 중국을 거쳐 생환▲1770년 = 부차길 등 22명 중국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1.01.08 01:40
-
◈조선시대 제주인의 표류②▲표류민의 송환 조선시대 조선·중국·일본 간에는 표류민 송환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적으로 오인해서 죽임을 당하는 경우라든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송환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특히 일시적으로 양국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경우, 그런 사례는 빈번하였다. 제주인이 중국·일본·유구국·안남국 등에 표류하였다가 돌아오는 데에 걸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1.01.08 01:40
-
▲1443년 = 강권두, 조괴실, 김초송 등 중국에 표류▲1471년 = 김배회 등 7명 중국 표류▲1479년 = 김비의 등 유구국 표류▲1483년 = 정의현감 이섬 등 47명 중국표류▲1484년 = 존자암 스님 등 9명 일본 표류▲1488년 = 제주경차관 최부 등 중국 표류 ▲1501년 = 정회이 등 일본표류 ▲1534년 = 김기손 등 12명 중국▲1536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2.31 01:40
-
◈조선시대 제주인의 표류① 사면의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야 했던 제주인들은 뜻하지 않은 바람을 만나, 다른 지역으로 표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중국이나 일본에 표류한 경우에는 서로간에 사람을 돌려 보내주는 송환체제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생존자들은 제주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간에는 미묘한 문제들로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2.31 01:40
-
◈조선시대 조선시대 이국인의 제주표도 제주는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해상 중심에 위치한 섬이다. 따라서 제주도 인근을 항해하는 선박들은 1,950m나 우뚝솟은 한라산을 항해의 이정표로 삼고 동중국 해상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그러나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 사람들은 언제 뜻하지 않은 바람을 만나 돛대가 부러지고 파도가 선박을 덮쳐 배가 파선될 지 모르는 불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2.25 01:40
-
▲1468년=중국인 43명 제주목▲1478년=일본인 묘무 등 300명 대정현▲1497년=일본사신 수명 등 제주목, 유구인 10명 ▲1530년=유구인 7명▲1545년=중국의 상선 326명 대정현▲1582년=중국인과 서양인 마리이 등 차귀포▲1611년=안남왕자 등 제주목▲1625년=중국인 고맹 등 32명 제주목▲1627년=서양인 네덜란드 Jan Janse We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2.25 01:40
-
◈조선시대 제주 유배인③ 정치인 등의 유배 제주 유배인 중에 정치적 인물이 많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인물들을 먼 섬지역으로 유배를 보냄으로써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이 그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충암 김 정 충암 김정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중종 때에 조광조와 더불어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을 다했었다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2.18 01:40
-
▲1721년=조성복(소론의 탄핵)▲1722년=신임·유성추·김수천·김학손(신임사화)▲1723년=조승빈(신임사화)▲1725년=윤지·이현장·서종하(신임옥사)▲1727년=임징하(탕평책반대)▲1731년=조관빈(이광좌 탄핵상소)▲1740년=김원재(위시보관사건), 이규채(탕평책 반대)▲1751년=이존중(탕평책 반대)▲1754년=조영순(탕평책 반대)▲1756년=최학령(탕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2.18 01:40
-
◈조선시대 제주 유배인② 왕족의 유배 조선시대 제주도에 유배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연유가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조선개국 반대, 왕자의 난, 무오·갑자·기묘사화, 왕명거부, 을묘왜변 패전, 정여립 사건 연루자들이 대부분이다. 조선 후기에는 제주를 비롯한 섬 지역에 주로 유배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제주도는 그 중에서도 정치적인 인물들이 주로 유배되었다.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2.11 01:40
-
▲1392년=한천, 김만희 조선개국 반대▲1402년=이미(조선개국 반대), 강영(왕자의 난) ▲1409년=민무구, 민무질 형제(왕자의 난)▲1469년=민수, 세조실록 사초 수정▲1496년=김순손, 연산군 비난▲1498년=홍유손, 무오사화▲1504년=홍상(갑자사화), 유헌(유자광 탄핵상소), 김양보(명령거부)▲1520년=김정, 기묘사화▲1522년=이세번, 조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2.11 01:40
-
조선시대는 명나라의 형벌제도를 정리한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여 사형(死刑)·유형(流刑)·도형(徒刑)·장형(杖刑)·태형(笞刑) 등 오형제도(五刑制度)를 두었다. 사형은 목을 졸라 죽이는 교수형과 칼로 목을 쳐서 죽이는 참형, 몸을 여러 개로 토막내는 능지처사 등으로 구분된다. 유형은 차마 사형에 처하지는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2.04 01:40
-
◈조선시대 제주 유배인① 유배지로 제주도가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원(元)에 의해서였다. '목마(牧馬)의 섬 제주', '유배의 섬 제주'라는 단초는 제주도가 원의 간섭을 받게되면서 비롯된 셈이다. 그후 조선은 제주를 본격적인 유배지, 목마지로 이용하였다. 조선시대 제주도 지역에 유배된 사람은 대략 200명 내외로 추정되고 있다. ▲유배지로서의 제주 조선시대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2.04 01:40
-
◈조선시대 해산물 및 약재 진상 전근대사회에서 백성들은 소위 조(租)·용(庸)·조(調)라는 세금을 국가에 내야 했다. 조(租)는 토지에 대한 세금이었고, 용(庸)은 일반 백성들이 부담하는 군역과 요역을 말한다. 조(調)는 국가에 필요한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進上), 즉 공납(貢納)을 의미한다. 제주도의 경우, 토지에 대한 세금은 다른 지역에 비해 1/2세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1.27 01:40
-
◈조선시대 귤의 재배와 진상▲귤나무의 종류 감귤(柑橘)은 알칼리성 식품으로 동맥경화나 고혈압 예방 뿐만 아니라, 피부미용 및 피로회복에 뛰어난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최근에 감귤을 이용한 주스, 젤리, 식초, 카라멜, 강정, 고추장, 다시마, 마요네즈 등 다양한 식품들이 개발되고 있다. 한때는 제주도에서 대학나무라고도 불리던 감귤나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1.20 01:40
-
◈조선시대 길운절(吉云節)·소덕유(蘇德裕)의 역모사건▲주동자 내통과 제주 입도 선조 34년(1601) 6월에 발생한 길운절.소덕유 역모사건은 제주인들에게 소위 '문충기(文忠基)의 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사건으로 제주인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총 30여명이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訊問)을 받았고, 결국 11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사형에 처해진 사람 중에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0.30 01:40
-
◈조선시대 제주의 과거운영 과거(科擧)는 가문의 혈통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음서제(蔭敍制)와는 달리,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시험제도였다. 고려·조선시대에는 관리 선발 제도로 오늘날 일종의 사법·행정고시 및 기술고시에 해당하는 과거를 시행하였다. 즉, 조선시대에는 크게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文科),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武科), 각종
지난 연재
제민일보
2000.10.23 0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