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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일본 속의 제주인 ⑪사회주의운동과 현창탑 해방은 무엇인가. 사회주의적 개념은 경제적 피억압계급이 빈곤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재촉한 건 당연했다. 일제 당시, 한국인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심취한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1차대전이후 사회민주주의운동이 대중적인 추종세력을 확보하던 무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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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7.02.2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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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에겐 애향(愛鄕) 뿐일제,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 자본주의 사회였지만 ‘자본’은 없는 사회가 한국이었다. 가난이 모든 걸 지배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렇게 20세기의 반세기는 수탈과 빈곤으로 요약되는 시대였다.가난에서 탈출하자며 목소리를 높인 건 1960년대 들어서다. 그렇지만 기반 시설은 갖춰지지 않았다. 그 때 도움의 손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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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7.02.07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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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학교를 다니면 북한사람으로 인식하던 때가 있다. 분단이 빚어낸 상처였다. 재일동포 그들은 일제의 억압 속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면서 밝은 빛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해방 후 조선인이라는 차별은 여전한데다, 남북으로 갈라진 상황은 재일동포 사회 역시 둘로 쪼개고 만다. # 조총련과 민단해방은 분명 새로운 분출구였다. 해방 5일 뒤인 194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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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7.01.2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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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움직인다. 개별 지역의 특수 문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지만 문화는 섞여 움직이게 마련이다. 여러 문화가 이리저리 섞이면서 혼성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 다만 제주 사회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에다, 조선시대 200년간 고립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문화와의 혼성화가 덜 됐을 뿐이다. 결혼도 개별 문화집단을 형성하는 객체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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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7.01.1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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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한국인, 더구나 제주인으로 살아남는 일이 쉽지는 않다. 여전히 한국인은 일본사회에서는 외국인이다. 한국인의 일본 유입은 100년을 맞지만 외국인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래도 그들은 나름의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들의 삶을 지켰다. 비록 일본인과의 결혼, 그에 따른 귀화 등으로 한국·조선 국적을 달고 있는 동포들은 줄고 있지만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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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7.01.10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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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본관동제주도민협회 사무실은 일본 도쿄의 최대공원인 우에노(上野)공원 서쪽에 위치해 있다. 사무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쉬운 건 아니었다. 발품 끝에 분쿄구(文京區) 유시마(湯島) 지역에 있는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정평보 도민회장(65·서귀포 토평 출신)과 김광일 부회장(55·제주시 삼양 출신)을 만나 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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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7.01.03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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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내 대표적인 거주지로 오사카를 꼽는다. 오사카에 제주인들이 모인 이유는 경제적인 욕구가 컸다. 가족을 만나러, 혹은 친척을 찾아 제주에서 오사카로 건너왔다. 그러나 제주인들은 오사카만 그들의 거처로 생각하지 않았다. 삶은 이동의 역사이면서 투쟁의 역사였다. 그 속에 제주인들은 새로운 희망의 땅을 찾아 나섰다. 바로 도쿄(東京)다.# 일본의 서울을 향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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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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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학교는 조총련인가. 그렇다면 조선학교는 북한의 학교인가. 이런 의문들이 들 법하다. 이유는 조선학교 교육 자체가 북한의 주체사상을 주입시키는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학교는 분명 재일동포들이 세웠고, 제주 출신 동포들이 그 학교를 다니며 한민족에 대해 배운다. 우린 늘 이런 사실을 간과해왔다.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는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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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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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일본 속의 제주인 ④민족교육의 현실 학교는 지식만 배워주는 곳이 아니다. 학교는 입시를 위해, 보다 나은 곳에 취직하기 위해 다니는 곳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그것도 외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재일동포에겐 학교의 중요성이 더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학교를 짓고, 그 속에서 민족교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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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6.12.2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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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본 속의 제주인 ③교육이 힘이다 1945년 해방은 떠나는 자와 남는 자를 만들었다. 떠나는 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는 자에겐 걱정거리가 있었다. 다름아닌 자녀들의 교육문제였다. 일제에 핍박받아왔던 재일동포들은 자식들만이라도 우리의 말과 글을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가슴속에 내재돼 있었다. 그런 희망을 반영이라도 하듯 해방이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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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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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일본 속의 제주인 ②코리아타운 오사카에서는 낯설음이 없다. 삼국시대 도래인들이 정착을 했던 긴키지방의 중심지였고, 일제 때는 제주인들을 비롯한 한국인들이 터를 잡은 곳이었기에 더 그런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다른지방과 달리 길거리에서 마주하는 이들의 생김새도 달라 보인다. 코리아타운을 찾았다. # 코리아타운은 제주타운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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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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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일본 속의 제주인 ①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재일동포를 만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왜 우리말을 쓰지 못할까?’ 그러나 그건 재일동포를 모를 때나 하는 소리다. 재일동포 그들은 고통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지금 일본이라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참정권도 없는 그들,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환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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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6.11.2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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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육지로 육지로 (16) 항구극장의 결의 옛 일은 기억속에 감춰지기 십상이다.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일이 아닌이상 묻혀지는 일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부산은 제주도민들에겐 단순히 거쳐가는 일상의 한 부분도, 역사속의 한 순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부산에서 살아온 도민들의 생활상은 기억에서조차 잊혀진 일이 돼 버렸다. 1950년 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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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6.11.2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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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당시 부산은 원료수입에 의존하는 고무, 방직과 수출지향 산업인 도자기, 조선업 등이 주요 산업이었다. 특히 미쓰이(三井) 계열을 비롯한 일본 독점자본이 일찍이 진출, 독점자본과 노동자의 대결구도가 형성돼 있었다. 때문에 부산은 조선공산당 산하 당재건 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각종 노동운동이 발생한 곳이다. 여기엔 물론 제주인이 포함돼 있다.# 부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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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6.11.1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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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육지로 육지로 ⑬부산에 심은 제주 ‘삼다도라 제주에는 아가씨도 많은데/바닷물에 씻은 살결 옥같이 귀엽구나…’(가요 「삼다도 소식」의 일부). 1953년 황금심의 입을 통해 세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삼다도 소식」은 제주도를 ‘가보고 싶은 곳’으로 만든 노래임에 분명하다. 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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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6.11.0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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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육지로 육지로 ⑫일본의 첫 관문 부산 1876년 개항은 일제의 조선 강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그 해 8월 맺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는 개항장에서 일본인 거주지역을 설정하는 등 열강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됐다. 그 중심지에 있던 부산을 찾았다. 부산지역은 개항의 중심이라는 지리적·역사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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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6.10.2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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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 만난 제주인들은 고소득층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그걸 성취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고통을 감내하며 일궜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생을 꾸려온 제주인들은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다. 제주 밖에 나가 있는 제주 경제인들의 연합체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제주도 스스로가 새로운 변화를 해야 한다는 질책을 던졌다.# 재외제주경제인협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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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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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 만난 제주인들은 고소득층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그걸 성취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고통을 감내하며 일궜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생을 꾸려온 제주인들은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다. 제주 밖에 나가 있는 제주 경제인들의 연합체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제주도 스스로가 새로운 변화를 해야 한다는 질책을 던졌다.# 재외제주경제인협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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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6.10.1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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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육지로 육지로 ⑨ 해병과의 인연 제주 현대사에서 해병은 빼놓지 못한다. 제주시의 중심인 동문로터리에 해병 충혼탑이 서 있을 정도로 제주와 해병대의 관계맺음은 끈끈하다. 제주도 젊은이 3000여명이 지난 1950년 8월 해병대 신병 3·4기생으로 대거 입대하면서 제주와 해병대의 본격적인 관계는 시작됐다. 이후 한국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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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6.10.0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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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육지로 육지로 ⑧포항에서 만난 두모악 제주 사람들은 자신의 흔적을 어떻게 남겼을까. 본 기획 취재를 하면서 수많은 문답을 하더라도 시간이라는 굴레에서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제주인들은 육지부와 다른 생활습관과 말씨를 갖고 있었지만 그것 역시 시간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다들 그 곳 사람에 동화돼 갔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문자로 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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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기자
2006.09.27 1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