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원이다] <2부> 제주의 혼을 심는다 : 김영규 주한미군·한미연합사·주한유엔사령부 공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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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관계, 북미, 한미관계 등을 지켜본 산증인 김영규씨를 만났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 만남, 효순.미선이 사건, 임수경씨 판문점으로 귀환, 이산가족상봉 등 분단으로 인한 많은 일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얘기를 들었다.
온 국민이, 전세계가 바라보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일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고 북쪽으로 향했다. 2000년 정상회담에 비해 많이 차분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반세기가 넘어도 헤어져 사는 이산가족들의 눈물은 여전했다.
이번 정상회담 때 가장 바빴던 사람중 하나가 김영규 공보관(60)이다. 정상회담 보도를 위해 국내외 많은 취재진들이 9월부터 몰려들었고 정상회담이 끝날 때까지 분주하긴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노 대통령이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가고 300명 규모의 방북단이 육로를 이용하는데는 한국정부와 미군, 북측의 긴밀한 협의가 필요했기에 김 공보관 또한 준비작업에 몰두해야 했다.
남북관계의 체온계라고 불리는 판문점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달라진 게 있을까?
김 공보관은 "역사적 성과를 이뤄냈지만 판문점에서 급작스런 변화를 찾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 정상회담 이후에도 많은 언론들이 판문점의 변화, 이를 테면 북측 군인들의 몸짓, 손짓, 표정 하나하나를 지켜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며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할 문제들이 많겠지만 남북문제가 하나씩 잘 풀려나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 공보관은 국내외를 통틀어 판문점에 가장 많이 방문한 주인공중 하나로 꼽힌다.
매주 수요일 이뤄지는 정기방문과 남북간 수시접촉으로 판문점을 방문하면서 지금까지 1000번 이상 방문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30여년간 한미관계를 지켜보면서 달라진 점을 묻자 김 공보관은 "과거 한반도에서 미국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확실히 현재는 무게중심이 한국정부로 이양됐다"며 "평시작전권이 한국정부로 이양되고 전시작전권도 오는 2012년 한국군으로 이양되는 문제만 봐도 이같은 상황을 잘 반영한다"고 말했다.
이번 2007정상회담 선언에도 '3자 또는 4자정상 종전선언' 명시도 한반도내 역학관계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음을 확인시켜줬다.
이처럼 분단상황에서 굵직한 일들을 접하면서 기억나는 일들을 묻자 김 공보관은 단연 2002년 당시 안타깝게 죽어간 '효순이.미선이 사건'과 89년 '통일의 꽃' 임수경씨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석하고 판문점을 통해 돌아올 때라고 말했다.
김 공보관은 "한국사람이면서 미군의 입장을 대변하고 양측을 조율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줄 몰랐다"며 "하지만 분명히 한국에 주둔해 있는 미군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져 주한미군을 너무 편향되게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또 김 공보관은 "주한미사령부에서도 '좋은이웃'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국민과 더욱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당시 시위가 본격화되기 이전 주한미군내에선 두 소녀의 죽음을 추모하는 촛불추모행사도 가졌었다"고 설명했다.
김 공보관은 임수경씨 사건을 보며 분단의 아픔, 한국젊은이들의 통일의 열망을 눈으로 봤지만 정작 북측으로부터 임씨를 인계받고 약 200m 쯤 남쪽으로 함께 걸어온 10분 정도의 시간에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한국이 미국을, 미국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차로 어려움이 많지않냐는 질문에 김 공보관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다를까에 대해서 정말 많이 고민했다. 80년대 대학가에서 널리 알려진 북한관련 서적도 읽고 미국에서 발행한 북한관련 서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역사, 한국역사 등등 많이 공부했다. 그들이 양쪽에서 주장하는 것을 모르고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고 말한다.
김 공보관의 집 서재엔 그래서 80년대 금서(禁書) 목록들이 한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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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규 공보관의 서재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1980년대 금서들. | ||
상투적이지만 바람직한 한미관계에 대해 묻자 김 공보관은 "거창하게 한미관계를 논하지는 않겠다"며 "다만 합리적 사고로 미국을 바라보고, 미국을 평가하는 게 필요한 것 같다. 때론 주한미군측에서도 한국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설명해주곤 하는데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쌓이면 많은 갈등이 해소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서울=변경혜 기자>
●김영규 공보관은
1947년에 제주시에서 태어나 제주북교와 제주중, 오현고,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6년 뒤늦게 군에 입대해 카투사에서 근무하다 경기도 동두천 미2사단 기관지인 '인디언헤드'의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군 제대 후인 74년부터 84년까지 미2시단 공보관으로, 현재는 주한미군 공보관과 한미연합사 공보관, 주한유엔사령부 3개 사령부의 공보관을 겸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