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의 뿔, 염소의 수염, 낙타의 목
주제·작풍 알면 제작연도가 보인다

[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6. 사슴
산양의 뿔, 염소의 수염, 낙타의 목
주제·작풍 알면 제작연도가 보인다

   
 
  ▲ 「사슴」  
 
지난 5회에서 이중섭미술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는 「사슴」은 제작년도가 ‘1950년대’로 표기되어있는 ‘연대미상’의 작품이라고 했다. 이렇게 제작년도가 불분명한 이유는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대표가 이 작품을 서귀포시에 기증하면서 이 작품이 언제 어떤 경로로 입수된 것인지, 전에 이 작품을 소장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가 이중섭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등 감상자가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만한 실질적이고 유용한 정보를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사슴」에 관한 작품정보를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도 「사슴」의 ‘주제’가 무엇인지, ‘작풍(스타일)’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고 감지해낸다면 이중섭이 언제 그린 것인지를 역으로도 얼마든지 추정해낼 수가 있다.

   
 
  ▲ 「매화」  
 

   
 
  ▲ 「연과 아이」  
 

실은 나도 「사슴」, 「연과 아이」, 「매화」를 2003년 처음 보았을 때는 속으로 가짜라고 생각했다.

① 이중섭의 선은 강한 것이 특징인데, 이 「사슴」의 선은 그렇지 않다. 완만하고 긴 곡선으로서 부드럽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단속적인 짧은 선을 추가함으로써 섬세함까지 보여주고 있다.
② 청록색과 황토색의 대비는 지금까지 공개된 이중섭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상 코드가 아니다. 배경에 그려진 청록색의 패턴도 이중섭의 어떠한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③ 이중섭의 엽서그림들은 1940년부터 43년까지 애인 마사꼬에게 그려 보낸 것들로서 그림이 엽서의 뒷면에 그려져 있는데, 이 「사슴」은 그림이 엽서의 앞면(주소 적는 면)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이중섭이 마사꼬에게 우편으로 보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④ 그리고 이 시기(1940년부터 43년까지)의 엽서그림들에 나타난 이중섭 싸인은 전부 ‘ㄷㅜㅇㅅㅓㅂ’이라고 적고 그 밑에 밑줄을 긋고 날짜까지 적었는데 이 「사슴」에 나타난 싸인은 ‘ㅈㅜㅇㅅㅓㅂ’이라고 적혀있다.

그런 이유에서 기증자가 제작년도를 ‘1950년대’라고 한 것일까? 어떻든 「사슴」의 이러한 점들이 나로 하여금 위작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가나아트센터가 구멍가게도 아니고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국내 최고의 상업화랑인데 어떻게 가짜 이중섭 그림을 진짜인 것처럼 꾸며서 지자체 서귀포시가 운영하는 이중섭미술관에 기증하는 사기행각을 벌일 수 있겠는가. 일반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미술품의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작품에 관한 정보를 정확히 밝힐 수 없는 상업화랑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겠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제주대학교 어느 교수로부터 걸려온 한통의 전화를 이중섭미술관에서 받게 되었다.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써 학생들을 인솔하여 이중섭미술관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미술관에 가면 학생들에게 작품설명을 해 줄 큐레이터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중섭미술관에는 큐레이터가 없다고 했더니, 그 교수는 큐레이터가 아니라도 좋으니 누가 작품설명만 해 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설명하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미술관에 올 학생들이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학생들일 줄 알았는데 다음날 미술관에 온 학생들을 보니 예상과는 달리 언론홍보학과 학생들이었다. 지도교수님은 최낙진 교수. ‘도서출판’을 공부하는데 이중섭미술관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중섭미술관의 세 작품 「사슴」, 「연과 아이」, 「매화」가 아직 위작시비에 오르지 않았던 때여서 학생들은 세 작품을 문제의 작품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해설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원하게 말해주지 못하는 답답함도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이중섭 작품을 올바로 알려주어야 할 텐데. 언론홍보과 학생들은 그 후로도 매년 이중섭미술관을 찾아왔고, 나는 그때(2003년)부터 「사슴」, 「연과 아이」, 「매화」의 작품세계로 빠져드는 탐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 이중섭(가운데)이 1952년 여름 아내를 일본으로 보내고, 그해 부산에서 찍은 사진. 왼쪽은 황염수, 오른쪽은 김서봉.  
 

#1953년

기증자가 「사슴」의 제작년도를 ‘1950년대’라고 했는데, 지난 5회에서도 말했듯이, 이 시대는 이중섭이 남한으로 피난 오기 전 원산에서 생활하던 1950년부터 그해 12월 월남하여 남한 각지를 떠돌다가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둔 1956년 9월 6일까지를 말한다. 만일 이 시기에 그린 것이라면, 그 중 몇 년도에 그릴 수 있었을까?

그림이 그려진 종이는 일본 관제우편엽서이다. 당시 남한에서는 이 엽서를 구하기 힘들었을 테고, 아마도 이중섭이 가족을 만나러 일본에 갔던 1953년 여름에 그린 것이 아니었을까. 당시 일본에 가서 아내를 만난 이중섭은 엽서에 주소를 적어 아내에게 부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이렇게 엽서의 앞면에다 그림을 그려 아내에게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 도화지에 그리지 않고 엽서에다 그렸는가라고 반문해볼 수도 있겠지만, 엽서는 이중섭이 연애시절 마사꼬에 대한 자신의 메시지를 담는 특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추억을 더듬어 이렇게 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중섭은 어떤 메시지를 아내에게 전하고 싶어서 이 그림을 그렸을까? 생각해보자. 1953년 당시 일본에 건너가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만난 이중섭의 심경이 어떠했을까를. 1년 전(1952년) 여름, 남편을 떠나 일본으로 간 아내는 일본에서 책을 사서 한국에 갖다 팔면 그 이익금으로 남편의 재료비를 충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화 30만원이 넘는 책을 외상으로 사서 마영일 씨를 통해 한국에 보냈는데, 마 씨가 책을 팔아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책값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결핵과 삯바느질로 쇄약해진 아내. 밤에 자다가도 악몽에 시달려 몇 번이나 잠을 깨는 아내. 식은땀을 흘리고 심한 기침을 하는 아내를 이중섭은 어떤 심경으로 보았을까. 책방 외상값을 갚느라고 저토록 고생하고 있는 아내에게 이중섭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폐결핵을 앓는 친구 구상(具常)이 왜관에서 요양 중이었을 때, 이중섭이 구상에게 천도복숭아를 그려주며 “님자 상이, 우리 구상이 이걸 먹고 요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했다는 구상의 증언처럼 아내에게도 생명감이 넘치는 동물을 그려주며 이 동물처럼 건강해지라고 기원해주지 않았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중섭 그림들은 대개가 터프한 그림들이다. 그런데 이 「사슴」은 상당히 부드럽고 섬세한 그림이라서 사람들은 사실적인 그림인 줄 알고 이중섭 그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사슴」은 부드럽고 섬세한 그림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다. <산양의 뿔과, 염소의 수염과, 낙타의 목을 가진 왜곡된 사슴>이다. 왜곡은 이중섭 그림의 특징적인 표현이라고 나는 지난 3, 4, 5회에서 설명했다. 평소 아내를 즐겨 사슴에 비유해서 그렸던 이중섭이 이번에는 쇄약해진 아내에게 좀더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기 위해서 산양의 뿔과 염소의 수염과 낙타의 목을 가진 사슴으로 그려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보라! 사슴은 경쾌한 워킹을 하면서 생동감 있는 자태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저 청록색의 패턴들은 기(氣)를 형상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땅에서 생성되어 위로 올라오는 대지의 기. 여러 번 반복해서 그려줌으로써 강한 생명력을 북돋우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여기에 그려진 네 송이의 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난초처럼 꽃대가 단독으로 쑥 뽑아져 올라와 그 끝에 핀 이 꽃들은 신화(神話)에 나오는 ‘생명의 꽃’처럼 보인다. 이 꽃은 다른 이중섭 그림에도 수없이 등장한다.

따라서 「사슴」은 아내의 건강을 기원하는 그림일 수도 있다. 이중섭미술관에 있는 이 「사슴」의 원화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사슴의 주위를 감싸고도는 기(氣)를 느낄 수 있다. 「사슴」은 빼어난 작품이다. 그것은 이 작품에 영적인 기운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위작자가 흉내 낼 수 없는 것으로서, 이 그림이 언제 그려진 것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더라도, 이중섭 진품임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그림의 작풍이 1953년 당시 이중섭의 작풍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또 다른 제작년도를 생각해볼 수가 있다. 다음 회에서 계속하기로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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