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같은 아이

[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10.「 연과 아이」
연꽃같은 아이


   
 
  ▲ 「반우반어」 1940.말  
 


나는 지난 9회에서 「연과 아이」는 ‘연꽃 같은 아이’를 그린 것이라고 했다. 이 그림에서 연꽃은 보이지 않지만 연잎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아이가 곧 연꽃임을 알 수 있다. ‘아이=연꽃’ 이러한 표현은 이중섭이 1940년에 그린 「반우반어」나 1941년에 그린 「연꽃이 핀 물가에서 노는 세 아이」에 나타났던 은유적인 표현이 발전한 것이라고 본다.

   
 
  ▲ 「연꽃이 핀 물가에서 노는 세 아이」1941.1.6  
 

   
 
  ▲ 「연꽃이 핀 물가에서 노는 세 아이」1941. 9.28  
 

   
 
  ▲ 「연꽃이 핀 물가에서 노는 세 아이」1941.10.초  
 


「반우반어」

이중섭이 엽서에 그려 애인 마사꼬에게 보낸 그림들 중에는 「반우반어」란 그림이 있다. 1940년 연애시절에 그린 그림인데, 그 후 마사꼬가 보관해오다가 1979년 서울에서 다른 엽서그림들과 함께 전시 공개했던 그림이다. ‘절반은 소(牛), 절반은 고기(魚)’란 뜻의 ‘반우반어(半牛半魚)’는 이중섭이 지어 붙인 제목이 아니다. 후일 다른 사람에 의해서 붙여진 제목인데 그림의 주제를 제대로 암시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이 그림에 대해 최석태 著 「이중섭 평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소가 바다에서 육지로 뛰어오르듯 하고 있다.” “꼬리 부분에 올라탄 사람이 앞 사람을 붙잡으려는 듯 팔을 뻗고 있고, 뿔을 잡고 목에 올라탄 조그만 사람은 뒤를 돌아보면서 한쪽 팔로 그 손길을 떨치려 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는 상관없는 듯 팔꿈치를 땅에 괴고 고개를 돌린 채 누워있는 사람” “물에서 솟아오르는 소를 맞이하는 듯한 오리” “소는 물고기 꼬리를 한 채 물에서 날듯이 뛰쳐나오고 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 물 색깔을 나타내기 위해 엷게 칠한 청색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와 연꽃에 칠한 살색은 눈에 좀 띄는 편이다. 이 살색은 팔레트에 버밀리온을 묽게 풀어서 아이와 연꽃에 똑같이 나누어 칠한 담채(淡彩)이다. 이렇게 똑같은 색깔을 두 개체에 칠해주면 두 개체가 통일(統一)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아이와 연꽃을 색깔로 통일시켜 ‘연꽃 같은 아이’라는, 말하자면 은유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 따라서 작가 이중섭이 이 그림에서 힘주어 말하고자 했던 주제는 ‘연꽃 같은 아이’이다. 최석태 著 「이중섭 평전?에는 “자연의 이치와는 다른 신화적인 내용의 그림이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그림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평한 글이다. 또 「이중섭 평전」에는 “전통적으로 친근한 소재를 조형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고 하면서 연꽃을 예로 들었는데 이것 또한 주제를 모르고 한 말이다. 이 그림에서 연꽃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소재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모르고 한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중섭 평전」에는 “마치 원산 사람이 신비한 세계를 소개해주는 느낌이다.”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연못가를 해안선으로 잘못 본 데에서 생긴 착오이다. 이중섭은 「연꽃이 핀 물가에서 노는 세 아이」에서도 유독 연꽃에만 색을 칠했다. 이는 그만큼 연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그림들(연꽃과 아이가 함께 등장하는 그림들)의 은유적인 표현을 발전시킨 것이 「연과 아이」의 표현이다. 「연과 아이」에서는 연꽃이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연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이를 대신 그려 넣음으로써 아이=연꽃, 즉 ‘연꽃 같은 아이’가 되게 표현한 것이다.

   
 
  ▲ 「연과 아이」(1952년경으로 추정)  
 

「연과 아이」

지금까지 「연과 아이」의 주제와 표현법을 짚어보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중섭이 왜 아이를 이런 연꽃에 비유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중섭 예술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인 것이다. 만일 이중섭이 디자이너였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삶의 방향과 대치되는 주제가 주어지더라도 산업사회의 요구에 따라 주어진 주제를 잘 표현 전달하는 사람이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반면, 예술가는 자신의 삶과 유리(遊離)된 표현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부산피난시절 이중섭에게 경향신문 연재소설의 삽화를 그리는 일이 맡겨졌는데도 그가 못하겠다고 사양한 것은 그가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나 행동에는 그의 삶이 묻어있다. 따라서 이중섭이 왜 아이를 연꽃에 비유했는지에 대한 해답은 반드시 그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951년 12월, 이중섭 가족은 서귀포 항을 떠난 지 이틀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은 황색의 도시였다. 전쟁에 시달리고, 정치에 시달리고, 피난민에 시달리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중섭은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든 부산. 길바닥에서라도 자야할 정도였다. 할 수 없이 아내와 두 아이를 피난민수용소로 보내고 자신은 오산고보 동창 김종영의 바라크에서 김종영과 동거했다. 바라크는 막사를 뜻하는 군대용어이다. 널판으로 개집처럼 지은 이동식 집. 장정 몇 명이 목도로 들어 나를 수 있는 정도의 무게였다. 낮에는 경찰서 일용직원들이 완장을 두르고 현장에 나와서 무허가 집을 아무데나 짓지 못하게 감시했다. 그래서 제3의 장소에서 몰래 바라크를 지어두었다가 밤이 되면 낮에 미리 봐두었던 장소로 친구나 동료들과 함께 영차 영차하고 나르면 그게 바로 내 집이 되는 것이었다. 김종영의 바라크도 범천동 산비탈에 즐비했던 그런 바라크들 중의 하나였다. 밤에는 범천동 김종영의 바라크에서, 낮에는 미군부대가 있는 부산항 부두에서, 저녁에는 친구들이 있는 광복동에서 - 이것이 제주도에서 돌아온 이중섭의 부산 스케줄이었다.

부산항 부두의 대부분은 미제21사단 항만사령부가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면서 이중철조망이 쳐졌다. 제1, 제2, 제3, 제4, 제5 부두는 모조리 군수물자 하역장이 되었고 외항선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항만은 한국 헌병이 5백 미터 혹은 천 미터마다 보초를 서서 엄중하게 경비했다. 석탄배가 들어오면 석탄 찌꺼기를 줍다가 사살당한 피난민 아낙네도 적지 않았다.

중섭은 그런 항만사령부 경내에서 드럼통을 굴리기도 하고 제1운수 날품팔이 일꾼이 되기도 했다. 점심식사래야 영외 바라크 식당의 비위생적인 양재기 밥 한술이었다. 그것을 먹고 30분만 지나면 벌써 시장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이봐! 노랑수염, 왜 만땅꾸인데 더 올려오나. 돼지 같으니라구!” 이런 반장의 욕설도 부지기수로 들어야 했다. 부두 노동에는 노소가 없었다. 15세짜리 허약한 소년도 노동을 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대개 그런 아이들과 중섭은 한패를 이루어 얘기를 했다. “아바지 계시네?” “앓고 이시오.” “저런, 큰일 났구만… 너 일할 만 하네?” “할 수 없디오.” 어떤 때는 일하고 받은 전표를 그런 아이에게 쥐어줄 때도 있었다. 하루의 노동을 전부 그 아이에게 바치는 셈이었다.

그 무렵 중섭은 부두를 나오다가 어떤 소년이 헌병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달려갔다. 껌을 파는 아이인데 널판을 훔치다가 발각된 것이었다. “여보시오. 당신들은 미국 사람이 아니지요? 이 아이는 당신들 동포잖소. 그렇게 때리지들 마시라요.” 하면서 헌병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자 헌병들이 “이 새끼는 웬 새끼냐”하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복싱을 잘하는 중섭은 헌병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삽시간에 헌병들이 뻗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부두 순찰대의 헌병 백차가 와서 서자 중섭은 차에서 내린 헌병들에게 치도곤으로 맞고 채이고 짓밟혔다. 그가 너무 많이 피를 흘리자 겁을 낸 헌병들은 그를 부두 밖의 병원에 실어다놓고 도망쳤다.

   
 
   
 
이 이중섭 이야기는 왜 이중섭이 아이를 연꽃에 비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것은 아마 흙탕물 속에서도 고결하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전란의 혼탁한 환경 속에서도 아이가 고결하게 자라기를 이중섭이 염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연과 아이」가 이중섭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고결한 작품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중섭 그가 곧 ‘연꽃 같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 오른쪽 불상은 이중섭이 해방직후 서울에 와서 미도파 백화점 지하실 벽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으로 구입했던 것이다. 피난 올 때도 품에 안고 왔고, 1953년 일본에 갔을 때도 가지고 갔다가 아내 마사꼬에게 주고 온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하기로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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